초자연적인 은혜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태복음 5장 41절


주께서 요구하시는 관계는 그분이 우리 안에 초자연적인 역사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압제와 불의를 당해도 그들 마음속에는 조그마한 분노를 품은 흔적도 없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그 부담은 그 어떤 열정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인데, 바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주님의 정결케하는 셈에 물레방아를 통과하면 오직 한 가지 목적만 남습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보내소서." 다른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만은 결코 희미해져서는 안 됩니다.
산상수훈은 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성향을 바꾸시고 주님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실 때 내 안에서 발생할 일들을 명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수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초자연적으로 제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끈질긴 노력으로는 분명히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시작하며 우리는 이 하나님의 강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택하심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우리 스스로 제자로 나설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 이끌리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의 역사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그 자취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 하나를 만드시는 과정은 초자연적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역량에 따라 제자를 세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라고 부탁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들만 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 일을 하려고 할 때 십자가는 언제나 따라올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25일 초자연적인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또 하나의 'Just go!'

어제 주제의 말씀을 저스트 고라고 잡았는데, 오늘 또 하나의 저스트 고. 오늘 묵상 제목에는 어제와 동일하게 원문에 보면 Go라고 하는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원문의 뜻을 살렸더라면 더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오늘 묵상에서 동일합니다. 어제는 사역의 준비를 위한 고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즉각적인 순종이 사역의 시작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원문의 제목이 The 'go of relationship'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른 관계를 위해 가라'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인 산상수훈은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가르침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야 따를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본성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챔버스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압제와 불의를 당해도 그들 마음속에는 조그마한 분노를 품은 흔적도 없어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그 부담은 그 어떤 열정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근거합니다. 챔버스는 이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어긋난 관계 속에서는 그 어떤 열정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 번 언급했던 그런 문장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할 수 없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이 대신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는데 자연적 본성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십 리를 기꺼이 가겠습니까? 억지로 가자고 하는 것이 우리를 압제하는 자일 수도 있고, 우리를 학대하며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터무니없는 부탁을 들었을 때 분노가 당연하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부당한 요구에 호의를 더해 베풀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사람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 말씀을 들을 때 너무 이상적이라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연적 본성으로 그 말씀을 대한다면 그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향을 바꾸셔서 그분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함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딱 한 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택하심은 전적으로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단지 그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음을 알 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과 연관 지어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택하심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우리 스스로 제자로 나설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드리죠. 우리는 주님의 택하심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우리 스스로 제자로 나설 수는 없습니다.
바른 관계를 위해 go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인 부르심, 주권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부르심에 대하여 주님은 전적으로 자발적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압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저 just go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며 우리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역량에 근거해 제자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은혜와 부르심에 대한 순종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탁하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명령하실 뿐이고 우리는 순종의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부르심에는 필연적으로 십자가가 따라옵니다. 오 리를 가자는 요구에 십 리를 가는 것은 분명히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go 할 때 주님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놀라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길 원한다면 just go 하십시오.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의 책, [팬인가 제자인가]에 보면 이러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보든이라는 사람이죠.
윌리엄 보든은 오늘날로 따지면 수십억 달러 가치에 달하는 낙농회사의 상속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예일대학교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학위를 취득하죠. 윌리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여행을 권합니다. 그리하여 유럽과 아시아 중동을 여행하던 중 복음이 닿지 않은 곳으로 찾아가라는 부르심을 느끼죠.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해 선교의 삶을 바치겠다는 편지를 부모에게 보냈고, 그러고 나서 자신의 성경책에 문장 하나를 씁니다.
"남김없이."(No Reserve)
윌리엄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예일대학에 들어간 그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한 친구와 함께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합니다. 윌리엄 보든이 4학년이 되었을 때 그런 모임이 예일 주변에 천여 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졸업 후 그는 성경책 뒷면에 다시 한 문장을 씁니다.
"후퇴 없이."(No Retreats)

그는 세계선교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중국의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하지만 중국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지역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그만 그곳에서 척수막염에 걸리고 말았죠 그리고 1달 뒤 25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카이로에 묻혔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성경책 속에 세 개의 마지막 문장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후회 없이."(No Regrets)
그는 남김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살았고 25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분노의 흔적을 지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지금 순종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주저하지 말고 고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제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도전이 있습니다. 지금 go, 가라고 하시는 말씀, 지금 행하라고 하시는 말씀, 후회 없이, 남김없이, 후퇴 없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주께서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우리들의 삶에 남길 수 있는 한마디, "내가 이렇게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고했습니다." 순종의 흔적을 남기는 하루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준비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장 23-24절


언젠가 우리가 온전하게 준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준비는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고 꾸준하게 유지되는 과정입니다. 현재 상태에 안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언제나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합니다. 젊은 성도들은 희생정신에 쉽게 매료됩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영웅 심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유심히 살피다 보면 갑자기 이러한 열정의 파도가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가라"는 준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마음을 자세히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웅적인 희생정신만으로 충분하지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하시는 일은 주님을 섬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성향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 안에서 그 성향을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숨기는 것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빛으로 찾아내도록 하십시오. 죄가 있다면 그 죄를 고백하십시오.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어떠한 모욕을 당할지라도 당신의 주와 선생 되시는 주님께 기꺼이 순종하겠습니까?
결코 주님을 향한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에 생각나게 하실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찾아내 점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뭔가 큰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에게 작은 무언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것 뒤에는 완고함이라는 성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포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24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Just go

오늘의 주제를 저스트 고라고 하는 그 영어 단어로 한번 잡아 보았습니다. 챔버스는 늘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우리의 사역이 한 번의 영적 체험에만 머물 때 위험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The "go"  of preparation이라는 원문의 제목을 본문과 연결시켜 보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울 것 같습니다.
모스포츠 기업의 브랜드 광고 중에 그런 게 있죠. Just do it. 오늘 묵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런 말일 것 같습니다. 본문과 연결을 시켜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난다면 바로 가서, go. 형제와 화목하고 오라는 말씀이죠. 바로 가서 고 화해하는 것이 사역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은 체험과 열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꾸준히 준비하지 않고 현재 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 챔버스 묵상글의 흥미로운 문장입니다. 젊은 성도들은 희생정신에 쉽게 매료됩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의 영웅 심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영웅 심리가 시험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영웅심으로 주님께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호언장담으로 인해 도리어 시험에 빠지게 되죠. 영웅 심리는 어떤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아닐까요? 감정으로도 얼마든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역해야 하는 현장은 감정이 다 사그라드는 곳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만일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 가라는 이 준비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라는 그런 말씀이 아닐까요? 여기에서 점검은 스스로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하시는 일은 주님을 섬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성향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숨기는 것이 무엇인가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역에 열심보다 우리의 상태를 훨씬 더 중요하게 보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역에 열심보다 우리의 상태를 훨씬 더 중요하게 보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go라고 하는 단어, 동사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아직 준비되지 못한 심려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자신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어떠한 모욕을 당할지라도 당신이 주와 선생 되시는 주님께 기꺼이 순종하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할 때 세상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확신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속에 생각나게 하셨다면 주저하지 말고 go 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금 go 하는 것이 사역의 준비입니다.
라이사 터큐어스트는 [즉각 순종]이라는 책에서 즉각적인 순종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이란, 사실 성경적인 순종을 말한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순종에서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이제는 매우 즉각적인 일처럼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사실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성품에 따라서 살아가는 당연한 삶을 즉각적인 순종의 삶이라고까지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즉각적인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즉각적인 축복도 경험할 수 없다. 순종이 바로 축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순종으로 사는 일에 온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온전한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순종이란 단지 '죄를 짓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종이란 우리에게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크고 간절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갈망이 실제로 행동으로 변하는 순간에, 당신의 순종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변하게 된다.
즉각적인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찔러주시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그 결과로 다른 사람들은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큰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지금 우리 마음속에 생각나는 작은 것입니다. 그것을 go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챔버스가 강조하는 권리 포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고집부리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완고함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께 숨기는 것이 있다면, 빛 가운데로 나와 당장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당장 해야 할 'go'는 무엇입니까?
지금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위대한 일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생각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위대한 일을 꿈꾸며 위대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마음속에 생각나는 그 일을 즉시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오늘 이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즉각적인 순종이 있게 하여 주옵시고 그 즉각적인 순종으로 인해 일어나는 즉각적인 축복을 경험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주의 뜻을 행하기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누가복음 18장 31절


자연적인 삶에 있어서는 사람이 발전함에 따라 야망도 바뀝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목적이 같습니다. 그 목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도록" 힘쓰며 그렇게 마칩니다. 선교사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지 유용한 사람이 된다거나 이방인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유용한 사람이 되고 이방인들의 마음을 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선교의 목적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십자가상에서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절정에 이르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그곳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핍박받는다는 이유로 어떤 마을들을 급하게 지나지 않으셨고, 그분이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어떤 마을에 오래 머물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감사나 배은망덕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뜻을 한치라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 10:24).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날 것이며 이에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두 사람은 감사를 표현할 것이오 나머지는 무섭도록 배은망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거기서 예술을 십자가에 못 박고"(눅 23:33). 이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을 때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의 구원의 문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로 인해 영광으로 마칩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좌우명은 "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라"가 되어야 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23일 주의 뜻을 행하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변하지 않는 목표

며칠째 선교사의 자격에 대한 묵상 말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원문의 제목은 선교사의 목표 또 The missionary's goa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교사의 목표는 인간의 환심을 사거나 하나님께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캠퍼스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우리는 유용한 존재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글을 옮겼습니다. 물론 유용한 사람이 되고 이방인들의 마음을 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선교의 목적은 주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지침입니다. 주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처음 주님의 일을 시작할 때 생각했던 목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상황도 바뀌고 사람도 발전할 테니 어쩌면 그러한 변화는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도록 애쓰며 그렇게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진희 목사가 쓴 [광야를 읽다]라는 책에 요런 글이 나옵니다.
낙타는 자기 짐을 지지 않는다. 주인이 실어주는 짐을 진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위해져야 할 짐이 있다. 내 몫의 십자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내게 주어진 사명,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자기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실어 주는 짐을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져야 할 짐을 마땅히 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시는 절정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절정의 장소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십자가 길을 막지 못했음을 압니다. 제자들이 앞을 막을 때도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주님을 핍박하는 마을에서도 사역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지나가셨습니다. 주님을 환대하는 마을에서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주님이 실어주신 짐을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나도 예루살렘으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그 길에 우리가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마태복음 10장 24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생이요 주 되시는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다면 우리 앞에도 똑같은 길이 놓일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날 것이며 이에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두 사람은 감사를 표현할 것이요 나머지는 무섭도록 배은망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누군가에게 감사와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기뻐하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누군가에게 조롱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주님처럼 묵묵히 그 길을 가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처럼 용서하며 그 길을 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구원의 길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영광의 문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좌우명과 최종 목표는 나도 예루살렘으로 가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위해서는 묵묵히 순종하며 그분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순종은 나의 생각과 목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기억해야 할 단어입니다. 끝까지.
언젠가 제가 설교에서 예화로 사용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성 프랜시스 형제회에 가입하고자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형제의 위원들에게 수도원에 들어가 함께 수도하며 전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위원들은 이 열의가 가득한 청년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고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프랜시스는 마지막으로 그 청년에게 한 가지 과제를 주었습니다. "젊은이 저기 배추가 한 포기 있는데 저 배추를 한번 거꾸로 심어보겠는가?" 프랜시스가 이런 엉뚱한 과제를 준 이유는 청년이 상식에 맞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에 합하지 않는 요구라 할지라도 영적인 스승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하는 자질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지배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의 최종 목표는 십자가를 지닌 것을 넘어, 십자가로 인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에게 하신 주님의 가장 불합리한 명령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순종의 길을 간다는 것은 중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 길을 가는 것임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삶 가운데 혹시라도 순종하지 못하여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없기를 원합니다. 주님, 끝까지 이 길을 갈 때에 우리의 길은 십자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됨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오늘 하루가 주님과 함께 순종하며 승리의 길에 들어서는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순종할 이유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한복음 13장 13절


주인을 모시는 것과 지배받으며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모시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아시는 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어떤 친구보다도 가깝고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아시며 내 영혼을 만족시키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마음속 모든 근심과 문제들을 알고 해결해 주심으로써 나를 안심시키는 분이십니다. 주인을 모신다는 것은 바로 "오직 한 분, 우리의 주인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취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다스리셔서 나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하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때는 그분이 나를 홀로 내버려 두셨으면 하고 바라는 때도 있지만, 그때도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정말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선생이요. 주 이십니까? '선생'과 '주'는 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세주, 거룩하게 하시는 분, 치유자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볼 때 주님의 다스리심을 서술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게시하시는 사랑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순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이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동등한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만일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지배받는 것처럼 예수님을 대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관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는 의식이 없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는 주님의 소유이기에 마땅히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22일 순종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주인 됨의 의미

어제 묵상을 통해 선교사로 부름 받는 것이 어떤 예정된 운명이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화로운 목적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오늘 묵상에서는 선교사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사실은 선교사가 되기 위한 선행 조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주인을 모시는 것과 지배받으며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모시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곳보다 더 나를 아시는 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묵상의 원 제목은 The missinary's Master입니다. 선교사의 주인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인은 우리를 가장 친밀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주되심' 이것의 특징은 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늘 우리에게 순종의 선택권을 넘기는 것이죠.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의지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많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우리가 따라간다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님이 우리를 다루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강요도 방관도 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도움의 장소]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죠.
참된 스승은 자신이 스승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종종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강요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면 잘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계에 순종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코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절대로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어떤 수단도 사용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나의 부족을 채우시며 나의 불순종을 용서하신다 만일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유함이 특징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한 가지만을 위한 자유임을 잊지 말라. 오직 주인께 순종하기 위한 자유라는 사실을 •••.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의 자유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분의 다스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은 우리를 다스리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진정한 관계

오늘 묵상본문은 요한복음 13장 13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요 선생이 되시느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심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첫 번째 주제에서 이야기했듯이 '주'라는 말은 우리가 단순히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 속에서 다스림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주되심을 이해할 때 그것은 순종을 통해 나타납니다. 지배가 아닌 사랑의 관계 속에서 순종이 나옵니다. 이러한 관계를 본문에서 히브리서 5장 8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순종이란 아버지와 아들처럼 동등한 관계에 기초합니다. 예수님은 동등하나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에 기초한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기꺼이 고난 받으시면서 순종하셨습니다. 이 관계에 대해 챔버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지배받는 것처럼 예수님을 대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관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는 의식이 없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챔버스가 말하고 있는 진정한 관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지배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소유임을 믿기에 마땅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의 [예기치 못한 기쁨]이라는 책에 이 놀라운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립니다.
나는 무슨 협박이나 약속 때문에 타락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거기에는 협박도 약속도 없었다 그분의 명령은 준엄했지만, 배후의 '제재장치'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답은 결국 "하나님이시니까"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그분의 주권이 법적으로 정당한 것임을 보여준다.
C.S. 루이스는 자신의 회심 경험을 돌아보며 어떤 협박이나 회유 없이 하나님의 본질을 깨달아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자체로 준엄한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습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에 모든 것을 맡긴 후에 누리는 평화는 우리에게 큰 주님의 다스리심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는 모든 결과에 초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환경을 조성하실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뜻대로 풍성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단 한 가지 일은 그분은 나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순종은 사랑의 관계에서 다스림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 다스림이 순종으로 인해 찾아왔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주님의 다스림을 우리들이 함께 묵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요 선생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주님 앞에서 우리들이 기꺼이 순종하는 그 순종을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사람들, 우리가 그 순종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순종은 억압이 아니라 기쁨이요, 순종은 우리들에게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며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우리 삶 가운데 임했음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 그런 하루가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하나님의 종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이사야 49장 5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가장 먼저 발생되는 사건은 우리의 편견과 편협한 생각들과 국부적인 충성심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만을 위한 종으로 변하게 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죄는 인류로 하여금 다른 길로 빠지게 하였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거듭날 때 우리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곧 나는 하나님을 위해 피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깨닫는 것은 이 땅에서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창조의 목적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일편단심의 마음을 채널로 하여" 전 세계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주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만일 망치게 되면 하나님은 한쪽에서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당할지라도 우리의 주장을 좌절케 하실 것입니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되었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완벽하게 빚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들이 왜 그렇게 가차 없이 엄격한지 이해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분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넣어 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완전한 엄정함을 요구하십니다.
당신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21일 하나님의 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챔버스는 선경훈련대학에서 설교할 때 선교사들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했습니다. 오늘 묵상도 당시 그가 했던 '하나님의 종'이라는 설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근거해 선교사의 부르심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핵심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에 대한 내용일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이죠.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답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혼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늘 묵상 제목은 Missionary predestinati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predestin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예정이라는 말이죠. 즉 선교사들의 예정된 운명입니다. 예정론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모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음을 고백하기 전에는 이 예정이 전혀 우리들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가장 먼저 발생되는 사건은 우리의 편견과 편협한 생각들과 국부적인 충성심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9장 5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이러한 이사야의 고백은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나온 것이죠. 하나님의 택하심을 깨달을 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알게 됩니다. 이 놀라운 깨달음 앞에서 우리의 편견과 편협한 생각이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우주적인 하나님의 관점에 비해 개인적인 충성심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책에 보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종의 성품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2절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종의 모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종은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지워버립니다. 억지로 혹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예수님만 드러냅니다. 종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집중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에게 집중합니다. 거짓 섬김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내려는 자아의식적인 교만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리라" 즉 그는 자신을 선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원하기 위해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의 권리가 받아들여지길 확고하게 바라셨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비난을 들을 때 "자, 제가 설명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수모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거리에서 주님이 자신을 신원하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전에서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손에 쥐고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택함 받은 종은 오로지 그를 택하신 주인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자신의 의도를 뒤섞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심판이 아닌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실 때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되었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 영광을 받으실까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선교사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창조목적에 쓰임 받도록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 앞에 너무 엄격한 요구가 있음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 때문에 이렇게 엄격한 요구들에 대하여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주님은 그분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넣어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완전한 엄정함을 요구하십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쓰임 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구주를 이전보다 더욱 잘 알게 됨으로써 그분이 뜻하시는 모든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나로 하여금 깊은 물을 지나가게 하셨다 불로 정결케 되지 않을 하나님의 종은 없다. 주님은 레위 자손들을 불 아래로 통과하게 하셨고 거기서 그들을 섬김에 합당하도록 정결케 하셨다 주님은 열매 맺는 봉사를 위해서 오직 정결한 그릇만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깨끗하지 않은 그릇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가 죽는 경험을 통해 주님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에게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결한 사람만을 열매 맺기 위한 종으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버거운 길을 가고 있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이 주어져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위함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ㅣ그렇다면 하나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루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예정된 주의 종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런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48절


이 구절에서 주님의 권면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애착에 따라 행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연스러운 애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고 어떤 사람은 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좋고 싫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 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자연적인 애착이 가지 않는 사람과도 교제하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본은 좋은 사람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의 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삶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온전함을 증거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주실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은 선을 행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면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인간적으로 훌륭한 특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안의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자체를 나타내려고 할 뿐 경건해지려고 애쓰는 인간의 생명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라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초자연적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과 교통 하는 시간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 가운데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접하게 되면서도 그 소용돌이 가운데 평정을 취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놀라게 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20일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이런 주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됨

오늘 묵상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규칙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온전함이란 하늘 아버지를 따라 우리도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주님의 권면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러한 좋고 싫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함을 닮아가는 것이죠. 이 온전함의 중심에는 관용이 있습니다.
찰스 링마가 쓴 [본회퍼 묵상집]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녹슬지 않는 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고통을 당했고 나치에 의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에서 본회퍼가 했던 말입니다.
"이곳은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 아래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이 함께 한다. 이런 내용이 그리스도인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와야 할 사람들을 포용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려내기를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 의미를 함축하면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 즉 가톨릭 교인과 개신교인, 복음주의자와 은사주의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를 구분하는 데 능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진 종파의 꼬리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진실과 사랑, 연합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단지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 그 이상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일치한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챔버스가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은 좋은 사람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의 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입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이 자연적 애착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연적 애착이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호감도, 요렇게 해석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감정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것과 관용의 정도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애착이 가지 않는 사람들과도 교제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에 나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글이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성도에 공동생활]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조금 읽어드리죠.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허락된 것은 전혀 자명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들 한복판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자들마저도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행학자와 조롱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완전히 홀로 남겨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수도원적 은둔생활이 아니라, 원수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일과 사명이 바로 그곳에 있는 까닭입니다.
제자의 조건은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의 기준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형제와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성도의 공동생활을 조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금의로 여기셨을 때, 그와 동시에 우리도 형제에 대한 금유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심판 대신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이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이제 우리는 형제들에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챔버스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은 선을 행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선을 행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에 차이는 무엇일까요? 표현이 조금 어렵지만 챔버스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자체를 나타내려고 할 뿐 경건해지려고 애쓰는 인간의 생명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초자연적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강조하는 것처럼 이러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과 교통 하는 시간이 아닌 구체적인 삶 한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변화산의 체험이 아닌 삶의 한가운데서 소용돌이치는 격랑 가운데서 경험하는 평안함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소망 내가 바라는 한 분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한없는 사랑 풍성한 긍휼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예수 닮기를 예수 보기를 예수만 높이길 내가 원하네
내 평생 소원 예수 닮기를 예수만 닮기를 내가 원하네

오늘 이 찬양이 여러분들 뇌리 속에 맴도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의 성품을 담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서 드러날 때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의 자연적 성품으로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나요?
하나님은 그 사람도 관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 닮기를, 예수 닮기를, 예수님 따라 살아가기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우리는 그저 선행을 행하면 좋은 그리스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단순한 선행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될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관용하고 용서하고 품어주는 것이기에 오늘 우리도 그 성품을 닮기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런 용서와 성품으로 주님 닮아감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누가복음 22장 28절


우리가 시험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실 때 주님과 함께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으실 시험이 어떤 것들인가를 경험하는 순간부터 주님과 함께 하기를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상황을 옮기실 때 당신이 예수님과 동행하는지, 아니면 세상, 육신, 마귀와 어울리는 지를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달고 다니지만 정말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들은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험들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게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삶 가운데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변에 허락하시는 여러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조성하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주님과 계속적으로 함께 하며 그 상황들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 시험들은 주님이 당하시는 시험들로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향한 시험들이지 우리가 당하는 시험들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예가 당신의 육신의 삶에 의해 좌우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지속적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주변의 환경이 당신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과 계속 동행합니까? 그 길은 겟세마네를 지나고 성문을 지나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외로운 길이며 아무 발자국의 흔적도 없는 곳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나를 따르라"는 음성이 있을 뿐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19일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험당함

오늘로써 어제 그제에 이어서 세 번째 시험에 관한 묵상이 마무리됩니다. 첫 번째 묵상을 통해 시험의 유익을 살펴봤고, 두 번째 묵상을 통해 주님과 동일한 시험을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세 번째 묵상에서는 어떤 시험을 당하더라도 주님과 동행하라는 권면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의 첫 번째 문장은 오늘 전체의 주제를 담고 있는데, 조금 난해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먼저 읽어드리죠. 우리가 시험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시험받으실 때 주님과 함께 합니까?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런데 정작 중요한 신앙적 물음은 주님이 시험당하시는 순간에 우리도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에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주님과 동행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동행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봉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받으신 시험을 경험하는 도중에 동행을 포기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진정한 동행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국민일보 미션란 겨자시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는데,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제가 좀 읽어 드립니다.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건 어떻게 살았다는 말일까요? 뜻밖에도 성경은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의 행위가 아니라 자세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동행하다'라는 히브리어는 부부관계를 의미합니다. 부부는 때로 다투고 얄미워 보여도 한평생 묵묵히 함께 걸어가는 사이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큰 부담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가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봅시다 어른이 세 살짜리 아이와 걸어간다면 누가 더 불편할까요. 아이는 제 갈 길을 가면 그만입니다. 보폭을 맞추고 속도를 조절하는 건 어른의 몫이죠.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도 우리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더 손해 보고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죄 많고 어리석은 우리에게 보폭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겠죠. 동행은 결국 은혜입니다.
시험을 당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시험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삶을 살 때 주님과 동일한 시험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죠.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들은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험들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게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삶 가운데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지금 주님이 당하셨던 것과 동일한 시험으로 씨름하고 있다면, 주님과 동행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시험 가운데서도 계속 동행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환경에서 자꾸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이 우릴 통해 시험당하실 때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거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난 자가 당하는 시험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는 시험입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예가 당신의 육신의 삶에 의해 좌우됩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시험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속적으로 충성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챔버스의 글이죠. 당신은 예수님과 계속 동행합니까? 그 길은 갯
겟세마네를 지나고 성문을 지나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외로운 길이며 아무 발자국의 흔적도 없는 곳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오로지 나를 따르라는 음성에 순종하며 가는 길입니다. 직접적으로 오늘 묵상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는 길입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우리를 부르신 자리에서 기꺼이 신발떨이개가 되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늘은 찬송가 449장으로 묵상을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 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해를 당하거나 우리 고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안위해 주시라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과 동행한다면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명예롭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시험을 당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시험당하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우리의 시험이 얼마나 귀한지 생각하며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목상은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 동행이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도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를 묻고 있습니다. 그 시험이 우리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난 자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당하시는 그 유혹과 고난을 우리도 당하고 있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가 시험을 당하고, 시험을 당할 때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주와 함께 동행하며 주님을 영예롭게 하는, 영화롭게 하는 하루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장 15절


거듭날 때까지 우리가 아는 한 가지 시험은 사도 야고보가 말한 것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그러나 거듭난 이후에는 우리가 다른 영역으로 옮겨져서 전혀 다른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곧 주님께서 당하셨던 시험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한 시험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 시험들이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우리가 거듭나 주님의 형제가 될 때까지는 전혀 다른 영역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하셨던 시험들은 일반 사람들이 당하는 시험들이 아니며, '인자'로서 하나님께서 당하셨던 시험들이었습니다. 거듭남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형성되면,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가지셨던 똑같은 상황을 우리의 육신의 삶을 통해 갖게 되십니다. 사탄은 거듭난 우리에게 그릇된 일을 하도록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통해 우리에게 넣어주신 것, 즉 우리가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관점을 바꾸려고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탄의 유혹을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유혹은 인격적 본성과 관련한 성품들을 외부의 세력이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당하신 유혹을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세상 죄를 감당하는 소명을 받으셨습니다. 이후에 당장 성령께서 그분을 사탄에게 시험받도록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치지 않으셨고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인격적 본성의 성품들을 온전히 지키신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18일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복된 시험이 있다

어제 묵상에서 시험은 우리의 내적 본성과 연관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즉 우리의 기질에 따라 어떤 것은 시험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했죠.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이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와 예수님의 내적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은 야고보서 1장 14절로 시작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제가 이해하는 바로 챔버스는 오늘 전적으로 다른 2종류의 시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시험은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받는 시험이 아닐까, 거듭나기 전에 받는 시험은 전적으로 우리의 욕심에 기인합니다. 하지만 거듭난 이후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주님께서 당하셨던 것과 같은 시험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시험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시험을 당해봐야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질문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유혹을 당하고 시험을 느끼나요? 예수님을 알기 전과 거듭난 이후 받는 유혹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온전히 변화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유혹을 느끼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단순히 시험이 주는 유익에 대해 묵상했다면, 오늘은 당하는 시험의 종류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유혹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챔버스의 글을 인용합니다.
사탄은 거듭난 우리에게 그릇된 일을 하도록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통해 우리에게 넣어주신 것, 즉 우리가 하나님께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관점을 바꾸려 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탄의 유혹을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시험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유혹받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존재가 되도록 유혹을 받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스터디 가이드]에 이 부분을 좀 명쾌하게 설명해 놓고 있어서 제가 인용해 보았습니다.
불신자는 마음의 하나님을 모시고 살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탄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몰아내라고 유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이러한 유혹이 "실제로" 다가옵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릇된 행동을 하도록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최종 결과는 잘못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도 그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가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방법이 나오는데요.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이렇게 조언하는 글이 나옵니다.
이런 건 죄가 사소한 죄가 아니냐고 말하고 싶겠지. 다른 젊은 유혹자들처럼 깜짝 놀랄 만한 죄악을 보고하고 싶어 안달 난 꼴이 보이는구나. 하지만 명심하거라. 중요한 것은 네가 환자들(그리스도인들을) 원수(예수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떼어 놓느냐 하는 것 한 가지뿐이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이 쌓여 인간을 '빛'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 수 있으면 그만이야.
C.S. 루이스는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전략이 큰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빛을 향하게 된 인간이 다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면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소멸시키고 말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이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받으신 소명을, 시험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나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시험을 지나시면서 죄를 범치 않으시고 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그 이후 주님의 사명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의 본성을 지켜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의 본성을 지켜내야 합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신 예수님은 시험의 본질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시험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시험의 본질을 알아야 하며 그 시험 가운데서 우리의 거듭난 본성을 지켜내야 합니다. 유혹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시험 앞에서 거듭난 자신의 본성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이 문장을 반복합니다. 유혹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시험 앞에서 거듭난 자신의 본성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시험이 올 때, 그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거듭나기 전 당신에게 시험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찾아오는 시험은 무엇인가요?
이 차이를 안다면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 우리는 시험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시험은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시험을 이겨낸 자들에게 그 시험은 복된 것입니다. 사단은 늘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존재를 다시 어둠의 존재로 바꾸어 가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시험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자녀로 끝까지 주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시험을 당할 때 그 시험이 주는 복된 유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