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역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고린도후서 10장 5절


이 구절은 성도가 쉬지 않고 싸워야 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바울은 "나는 나의 모든 사역이 그리스도께 순종되도록 철저하게 사로잡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최근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역들이 전혀 훈련받지 못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습니까?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삶 가운데서는 그분의 모든 사역이 아버지의 뜻에 맞도록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결코 아버지의 뜻과 분리되어 자신의 뜻대로 즉흥적으로 된 사역들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이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모든 사역들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그분께 순종되도록 훈련하기보다는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위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져서 곧바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실용적인 사역들이 너무나 강조되고 있으며 주님께 모든 사역을 순복 시키려는 신자들을 향해 하나님과 영혼들을 향한 열정이 부족하다 고 비난하는 세대입니다. 올바른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서 발견됩니다.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속성에서 나오는 열정으로는 주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참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발생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든 사역을 주님께로 항복시키기보다 전혀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냄새나는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하나님, 세상, 죄와 사탄을 향한 관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이 뜻은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할 책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9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훈련이 필요하다

3일 전 묵상을 시작하며 2개씩 짝을 이룬 3개의 미니시리즈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오늘 묵상은 어제와 짝을 이루는 두 번째 미니시리즈에 해당합니다. 번역본의 제목은 다르게 되어 있지만 원문 제목을 보면 어제와 오늘이 동일합니다. Do it yourself, 당신 스스로 하십시오라고 하는 제목으로 되어있습니다.
어제와 동일한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훈련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 말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성도들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것을 챔버스는 성도의 훈련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묵상은 특히 사역자들에게 신랄하게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한결같은 기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역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한 지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훈련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챔버스는 지금 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지금 모든 사역들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그분께 순종되도록 훈련하기보다는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위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져 곧바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종교적 체험을 하는 것과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것과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죠. 그런데 종교적 체험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저 아는 것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알기 위해 훈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역이란 어떤 것일까요? 챔버스는 무엇보다도 실용성을 강조해서 주님께 순복 하려는 신자들을 비난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세상에서 얼마나 실용성이 있겠습니까? 순종의 훈련이 되지 않는 사역은 인간 냄새가 납니다. 챔버스에 글을 옮겨보겠습니다. 참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발생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든 사역을 주님께로 항복시키기보다 전혀 훈련되지 않은 인간의 냄새나는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 [기독교의 진리]에 보면 올바른 사역을 올바른 관계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은 그분을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홀로 있을 때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또한 당신의 소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고상해 보이는 다른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과 이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인내하십시오. 늘 평안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흔들림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러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매 순간 주님께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올바른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곳에 있습니다. 올바른 사역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잘 알고 그분께 순종하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순종을 위해서는 올바른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훈련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역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셨던 생각들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셨나요? 예수님은 죄와 사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나요?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배울 때 우리의 사역이 즉흥적이거나 인간적인 경향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잘 아는 말씀이죠.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야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재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에서 훈련된 삶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훈련된 삶이란 3가지를 의미한다.
즉, 주께서 생명을 주신 최상의 목표를 나의 목표로 삼는 것, 대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삶의 규칙을 지키는 것,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과 주의 말씀에 완벽하게 충성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해 반항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모든 충동과 감정은 철저하게 다스려져야 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깨달음이 하나님과 주의 말씀에 어울리는가를 철저하게 점검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당장 버려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역은 하나님과 일치된 관계로부터 오는 결과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챔버스는 우리들에게 훈련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훈련하려고 하지 않는 나태함 가운데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훈련은 단순한 우리의 육신의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훈련,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훈련,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려는 훈련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그저 그렇게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제자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로 훈련된 자로 이 땅 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 가운데 구체적인 훈련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 변화되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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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의지한 싸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고린도후서 10장 5절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 중 선입견 같은 것들은 신자들이 무시하면 제거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부어진 신적 능력에 의해서만 강제적으로 제거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은 우리가 싸우기보다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을 대항하여 날뛰는 모든 이론과 개념은 인간의 노력이나 타협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뜻을 다해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할 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향을 바꾸시고 우리가 성화의 과정으로 들어가야만 그 싸움은 시작됩니다. 이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결코 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구속을 통해 죄를 다루실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육에 속한 삶을 영에 속한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도 그 싸움이 쉽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싸움은 오직 계속적인 믿음의 선택을 통해 승리할 수 있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성품이 거룩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죄사함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그 상태에서 계속적인 믿음의 선택을 통해 거룩한 성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택은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의 생각과 논리에 계속적인 반감을 일으킬 것이며 하나님의 지식을 대항해 날뛰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게 적개심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후퇴하여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 없는 삶을 살 수도 있고 강한 결심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을 멸절시켜 나아가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른 영혼들을 구원의 영광으로 인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8일 하나님께 의지한 싸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진정한 싸움은

오늘 묵상을 이해하는 데는 오늘 챔버스의 글 중에 첫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읽어 드릴게요.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장을 자세히 그리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흔한 착각 중 하나는 죄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본성이 변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한 고백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남아있는 그의 본성 때문에 고민했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싸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같은 것은 우리가 무시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죄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구석을 통해 다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챔버스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향을 바꾸시고 우리가 성화의 과정으로 들어가야만 그 싸움은 시작됩니다. 챔버스는 죄에 대해서 우리가 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거룩과 성화]에 나오는 글을 읽어보면 조금 더 자세하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로마서 6장 13절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다. 당신은 구원받은 영혼으로서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렸는가
로마서 12장 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재물로 드리라"
바울은 "네 모든 것을 드리라"고 하지 않고 "네 몸을 드리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이 말씀에 순종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몸을 죄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죄는 인간의 본성 안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 살 권한은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인성에 속하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의 성향을 부인하라

죄를 십자가 있는 곳으로 가져가 못 박으라(롬 6:6) 죄, 곧 당신 자신에 대한 권리가 당신을 더이상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라 죄의 성향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다스리시도록 하라 결코 몸에 어떤 지체라도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향을 바꾸시면 육에 속했던 삶이 영에 속한 삶을 살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죠. 캔버스는 이 싸움의 영역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죄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죄로부터 구원받은 우리의 싸움은 성화의 길을 위한 것입니다.

믿음의 선택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이 Do it yourself,  '네 자신이 해라' 이런 뜻인데요. 우리가 해야하는 영역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챔버스의 말을 옮겨봅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도 이 싸움이 쉽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싸움은 오직 계속적인 믿음의 선택을 통해 승리할 수 있는 싸움입니다.
토마스 왓슨이 쓴 [천국을 침노하라]에 나오는 글입니다.
나는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천국을 소유할 것이다. 그런 의지는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 결연한 의지는 나무공을 힘차게 구르게 하는 경사로와 같다. 구원받고 싶은 의지와 죄를 짓고 싶은 의지가 적당히 섞인 절반의 의지로는 천국을 침노할 수 없다. 이는 목적지가 없는 여행자가 때로는 이 길로, 때로는 저 길로 달리다가 결국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선택, 그것은 우리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절반의 의지를 가지고 이길, 저 길로 헤매다 보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챔버스는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우리의 몫은 방향을 바꾸기 위한 의지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토마스 왓슨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육에 속한 삶을 영에 속한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우리가 계속 믿음의 선택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선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생각과 논리에 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선택이 하나님의 지식을 대항해 날뛰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게 적개심을 갖게 할 것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어요. 믿음의 선택은 우리의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선택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고, 반대쪽을 선택한다면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선택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 것이고. 반대쪽을 선택한다면, 이 세상에서 영적인 패배자로 살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야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일지라도 믿음을 선택하는 자는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의 삶에서 믿음을 선택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의미합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린 이 세상에서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서 이길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시고 죄를 이기는 능력을 우리들에게 이미 부여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결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딪치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믿음의 눈을 뜨고 믿음의 행동을 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은혜의 샘물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장 14절


주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은 물이 흐르는 도랑이 아니라 생수가 솟는 샘입니다. "가득 채우라." 그러면 그에게 부어진 그대로 주님과의 생동력 있는 관계의 아름다움이 그 성도로부터 차고 넘치도록 흘러나올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생명이 마땅히 넘쳐 흘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는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무언가 그 흐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근원(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복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당신으로부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흐르실 수 있도록 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사해 같아서 언제나 받기만 하고 절대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확실하게 받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를 통해 생수의 강을 흘러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주지 못하시는 이유는 그만큼 주님과의 관계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과 예수님 사이의 거리를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분을 믿는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어떤 축복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요 어떤 경험도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생수의 강입니다. 근원(예수님)에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의 믿음과 그분과의 관계를 잘 지키십시오. 그러면 메마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가운데 끊임없는 생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흐를 것입니다.
믿는 한 사람으로부터 강이 흐를 것이라는 말이 너무 지나칩니까? "내게는 강이 보이지가 않네요" 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관점에서 당신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 사역의 역사에서 보면, 그 강물은 언제나 거의 보잘 것 없고 유명하지 않으며 무시당하지만 변함없이 주 예수님께 진실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7일 은혜의 샘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어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마치 강물과 같아서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장애물을 극복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묵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마치 샘물처럼 솟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챔버스가 이런 표현을 씁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은 물이 흐르는 도랑이 아니라 생수가 솟는 샘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주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차고 넘치는 샘물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성도의 책임입니다. 혹시 무언가 흐름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 샘불의 근원이신 주님과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책 [구원의 은혜]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수로나 도관의 역할을 한다. 은혜는 샘의 근원이다. 믿음은 자비의 물줄기가 흘러가는 통로와 같은 것으로 이 통로를 통해 흐르는 물로 목마른 사람이 소생함을 얻는다 이 통로가 파괴되는 것은 큰 비극이다. 로마에 가보면 유감스럽게도 더이상 물을 흘러내리지 못하는 많은 수로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아취들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수로는 물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여전히 보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믿음도 진실하고 건전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잘 연결시켜 줌으로써 영혼을 위한 자비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목마른 사람은 은혜의 샘에서 믿음이라는 수로를 통해 솟아나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수로에 문제가 생기면 더이상 물이 공급되지 않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더 이상 넘치는 은혜가 흐를 수 없을 것입니다.
챔버스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복은 개인적 축복이 아니라 생수가 나에게로부터 흘러넘쳐 누군가에게 복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오늘 우리의 삶과 기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축복의 통로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생수가 우리를 통해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이죠.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폭로는 주님께 쓰임받는 인생입니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죠. 요단강은 저 위에서부터 흘러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그곳에는 생명이 삽니다. 그런데 요단강이 흘러 사해에 고인 물은 더 이상 흐를 곳이 없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갔을 때, 요단강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맑지도 않고 넓지도 않아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무척 넓고 깨끗하고 유명한 휴양지였던 것을 보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곳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흘러 들어온 축복을 나누지 않으면 죽은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영생하는 샘물이 되라는 명령은 끊임없이 흘러 누군가에게 복이 되라는 뜻입니다.

생수의 근원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생수가 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 역시 주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아마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바로 관계일 거예요.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는 오스왈드 챔버스는 끊임없이 인용하고 이야기 하고 있죠. 주님으로부터 생수를 확실하게 공급받고 있다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나눌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주님께 생수를 공급 받지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나 경험을 나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생명이 흘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권혁승 교수가 쓴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칼럼에 좋은 참고될 만한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코르'는 땅속에서 솟아나는 지하수 샘물을 의미한다. 이 물이 흐르면서 큰 물줄기가 되고, 여러 개의 물줄기들이 모여 큰 강을 이루기도 한다. 그런 생수의 근원은 때를 따라 내리는 비와는 성격이 대조적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겨울 우기에만 내리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강우량의 편차가 커서 농경과 목축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시기나 장소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제한 없이 넘쳐 흐르는 생수의 복이 되신다는 선언이다.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교회가 세상에 주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도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물질로 선행을 베풀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도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의 믿음과 그분과의 관계를 잘 지키십시오. 그러면 메마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가운데 끊임없는 생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흐를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그런데 이런 관점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면 나에게서 기대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내게서부터 흘러가는 샘물의 근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에 의미를 자신에게서 찾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 나라 사역의 역사에서 보면 그 강물은 언제나 거의 보잘것없고 유명하지 않으며 무시당하지만 변함없이 주 예수님께 진실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과 10절 말씀은 사도바울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묵상을 마치려고 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축복의 통로가 되는 근원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고 있습니까?


기도히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은혜의 샘물이 되어라.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라. 누군가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라.' 이 유익은 단순한 물질의 도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누군가를 살리는 샘물이 되라는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만나는 상황과 시간들 가운데 그 샘물이 솟아남을, 생명이 솟아남을 증거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축복의 강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한복음 7장 38절


강은 그 근원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충만하심을 받으면 그 충만함이 우리의 삶에서 아주 작게 보일지라도 우리로부터 강이 흐르기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강물이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에 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세상을 향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지를 그 사람에게 좀처럼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강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면서 승리하는 모습으로 흘러갑니다. 한동안 꾸준히 그 길을 따라 흐릅니다. 그러다가 장애를 만나게 되고 한동안 막힙니다. 그러나 곧 그 장애물을 돌아서 길을 만들고 나아갑니다. 강은 꽤 긴 거리 동안 보이지 않다가 곧 다시 넓게 합쳐져서 전보다 더 큰 물줄기가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에는 장애물이 나타나 당신은 아무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근원이신 예수님께 계속 집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 장애물을 피해서 가게 하시거나 그 장애물을 아예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강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합니다. 절대로 당신의 시야를 장애물 또는 어려움에 고정시키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잊지 않고 근원과 가까이하고 있다면, 강은 당신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 그 장애물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것도, 감정이든 경험이든, 당신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끼어들어 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 어떤 것도 유일하고 위대한 주권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당신을 차단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우리를 통해 멀리까지 흘러나가 많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살찌우는 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놀라운 진리들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주께서 보여주시는 모든 진리들은 주께서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하시는 강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 안에 강한 축복의 강물을 흐르게 하십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6일 축복의 강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것

오늘부터 6일 동안 2개씩 짝을 이룬 3개의 미니 시리즈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오늘부터 2개씩 이렇게 묶어본다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인생을 거대한 강에 비유합니다. 거대한 강물은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도도하게 흘러갑니다. 강의 근원이 어디인지, 또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충만한 축복을 받으면 우리를 통해 그 축복이 땅끝까지 잃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챔버스의 이야기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세상을 향해 얼마나 위대한 축복인지를 그 사람에게 좀처럼 보게 하지 않으십니다.
챔버스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순종, 겸손과 관계있는 말이 바로 위의 문장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 신발떨이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축복이 흘러넘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 것뿐이죠.
오늘 묵상글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누군가의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만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받은 축복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독교 진리]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시편 135편 6절 말씀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의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세상에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그분의 뜻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께는 어려운 일이 1도 없으십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이 이기지 못할 어떠한 죄도 실패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 삶이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를 통해 땅끝까지 '축복의 강물'이 흘러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 29)

챔버스가 우리 인생을 강으로 비유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강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면서 승리하는 모습으로 흘러갑니다. 한동안 꾸준히 그 길을 따라 흐릅니다. 그러다가 장애를 만나게 되고 그러면 한동안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곧 그 장애물을 돌아서 길을 만들고 나아갑니다.
오늘 챔버스의 비유가 참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은 흘러갑니다. 그렇게 긴 거리를 흐르다 보면 여기저기 물이 합쳐져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됩니다. 그 사이사이에 우리를 돕는 사람도 있고, 커다란 장애물을 만나 삶이 하찮고 쓸모없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강을 만들고 계십니다. 난관을 만날 때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다시 강물이 흐르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물이 흐르다 장애물을 만나면 조금 늦어지는 듯 보여도 장애물을 돌아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어 굽이굽이 흐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장애물은 늘 찾아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을 장애물에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히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만일 당신이 잊지 않고 근원과 가까이하고 있다면, 강은 당신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 그 장애물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강이 흘러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은 주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장애물과 어려움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는 것이 장애물을 극복하는 첫걸음입니다.
성령의 강은 축복의 강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 안에 축복의 강물이 흐르면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까지 풍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미즈너 겐조라는 사람을 아시죠? 불시에 찾아온 뇌성마비로 인해 눈을 깜빡이는 것과 미소를 짓는 것 외에 무엇 하나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강이 그해 안에 넘쳐흘러 많은 이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냈던 사람 말입니다. 그의 시집 [감사는 밥이다]에 보면 이런 시가 나오고 있습니다. <힘들지 않았다면>이라는 제목이죠.
만약 내가 힘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을 테지
만약 많은 형제자매가 힘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못했겠지
만약 주 대신 예수님이 고난 받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없으셨겠지

오래전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홍정길 목사님이 어떤 집회에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납니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가 지은 유명한 '나'라고 하는 찬양을 들은 후 "송명희 시인이 공평하다고 하면 공평한 것입니다."라고 했던 말입니다. 이 찬양 잘 아시죠.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강줄기가 흘러 넓어질수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영적 유익을 끼치겠습니까? 우리를 통해 주의 진리가 흐르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능력입니까? 그러니 오늘 여러분들이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오늘 여러분들을 통해 무엇이 흘러가는가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축복은 강줄기가 흘러가듯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에게 주신 축복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습니까?
그 물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 우리를 사용하시는 이유,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이유는 그 축복이 흘러넘쳐가게 함이라고. 마치 축복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그 축복의 강물이 흘러가게 하여 주옵소서.
때로 우리의 인생의 어려움 난관 우릴 가로막는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은 잠시 늦을 수는 있으나, 그 물줄기를 바꿀 수는 있으나 멈추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거대한 강물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이 이 도도한 축복의 강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 주신 은혜가 흘러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깨어 있으십시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마태복음 26장 40절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은 다 내려놓고 오직 주와 함께 온전히 깨어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후 처음 단계에서는 주님과 '함께' 깨어있지 않고 주를 '위해' 깨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삶의 상황들 가운데서 성경의 계시를 통해 주님과 함께 깨어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겟세마네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자신과 함께 하나가 되자고 제안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싫어요, 주님. 저는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요. 게다가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는 분과 함께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왜 고통을 당하셨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과 함께 깨어있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분과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단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깨어 계신다는 생각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으로 주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무엇을 추구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슬픔 가운데 잠이 들었고, 그렇게 친밀했던 3년 동안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끝에 가서는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 여기서 "저희"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일들이 그 사이에 발생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지난 후에,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됐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이후 그들은 그들의 남은 생애 가운데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던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5일 깨어 있으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함께'가 어려운 이유

[주님은 나의 최고봉] 이 책의 편집자인 비디의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9월 3,4,5일 묵상은 한 세트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3일 묵상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희생, 4일 묵상은 주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진정한 사역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묵상에서는 그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깨어 있으라는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둔 상황에서 제자들을 향해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주님과 함께 깨어있지 못했을까요? 챔버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후 처음 단계에서는 주님과 함께 깨어있지 않고 줄을 위해 깨어 있을 뿐입니다.
원문을 보면 watch with 그리고 watch for라고 하는 2가지 표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요? 처음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는 주님을 기대하며 우리가 주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watch for him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구요. 이 단계에는 아직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리스도인,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깨어서 기도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순간과 상황들 가운데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는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깨어있지 못했던 이유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깨어 계신 것에는 익숙하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용규 선교사가 쓴 [더 내려놓음]에 나오는 글이 오늘 묵상을 이해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읽어 드립니다.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힘들어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 가운데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막는 영역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자. 예수님의 발치에까지 가지고 나갔지만 더는 깨뜨리지 못한 채 여전히 두 손에 꽉 틀어쥐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저는 깨어지기 싫습니다. 상처받기 싫습니다. 내 체면도 좀 생각해 주세요. 나도 영광을 같이 받고 싶습니다. 나도 적당히 같이 누리면 안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네 안에 네가 너무 크면 내가 들어갈 수 없단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구나.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네 안에 네가 너무 커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네 것을 달라는 이유는 네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너를 온전케 하려면 네가 잡고 있는 그것을 깨뜨려야 한단다.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네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으니 줄 수 없는 거란다."
우리 안에 혹시 하나님조차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는가? 이 영역 안으로 주님을 초청하라. 주님이 내 의식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셔서 나의 주관자가 되어주셔야 한다.

이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나를 위해 깨어 계신 주님만 바라지 말고,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야

제자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해하지는 못 했습니다. 우리 자연적 인간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동산에서 잠들어 있었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의지나 본성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강림 사건 이후에 깨어서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여기에서 그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버리고 떠났던 그들과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남은 생에 주님과 함께 깨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은 The missionary watching입니다. 선교사로 부름 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주님과 함께 깨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을 때 우리는 자의적으로 생각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찰스 스탠리가 쓴 [변화를 이끄는 성령 충만의 법칙]에서 성령 충만이 빚어낼 변화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면 경제적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결과가 나타나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미국의 모든 신자가 매일 아침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일터에 나가 최선을 다해 일한다면, 일의 질이나 생산력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올바른 동기로 행한다면, 사람들의 태도가 개선되고 사기가 크게 진작될 것이다. 마음이 즐거우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들이 저절로 생각나게 되고 혁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모든 신자가 가족과 친구들은 물론 일상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증오와 분노와 불신이 사라져 노상폭동, 폭력, 범죄, 온갖 형태의 학대가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성령 하나님은 우리 몸에 활력을 주시고 정신을 깨우치시며 열정을 자극하신다 성령 충만을 통해 우리 속의 잠재력이 발휘될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잠재력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인도하심이 없을 때 우리가 자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의 삶에 성령님이 함께하시며 가르치신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아니 십자가를 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하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주님이 행하시는 구원사역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고 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주님과 함께 걷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성령의 도심을 요청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 안에 찾아오실 때, 주님을 이해하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게 될 때,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함께하는 그 일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고백하고 간증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십시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요한복음 17장 6절


선교사란 하나님의 영이 다음에 깨달음을 허락하시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하는 것은 영적 성장에 있어서 높은 위치에 이른 것입니다. 현실적인 소요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진정한 삶의 특징은 완전한 하나님의 주권 앞에 마음을 다해 자신을 비우고 다른 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속성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며 나로 하여금 주님과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주께서 그들을 위해 이루셨던 기적을 근거로 제자들을 파송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누구셨는지를 알아보기 전까지는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그가 착하고 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주께서 '내 것'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주께서 말씀하시는 인간관계는 주님을 향해 경쟁이 되는 관계입니다. 나는 부모님께 속하기를 더 원하고 배우자 또는 자신에게 속하기를 더 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께서는 "너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분 자신의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그 사람에 대해 책임지십니다. "너는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영은 주를 위해 뭔가 하게 하는 영 이라기보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존재로 만드시는 영입니다. 진정한 선교의 비밀은 "나는 그분의 것이라.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통해 그분의 사역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십시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4일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십시오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선교사가 되기 위한 조건

7월 31일 묵상 제목이 '온전하게 주의 것이 될 때까지'였습니다. 오늘 제목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십시오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죠? 맞습니다. 7월 31일에 묵상은 성경훈련대학이 문을 닫기 2주 전에 곧 헤어질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에 대해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묵상은 당시 설교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그리면서 챔버스의 묵상을 여러분들이 듣는다면 좀 더 선명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챔버스를 이렇게 이야기하죠. 선교사란 하나님의 영이 다음의 깨달음을 허락하시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하는 것은 영적 성장에 있어서 높은 위치에 이른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 짐 엘리어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전기 [전능자의 그늘]에 보면 그가 선교사를 꿈꾸며 기도한 글이 나와있습니다. 이런 기도문입니다.
아버지, 제 생명을 취하소서. 님의 뜻이라면 제 피를 취하소서. 주님의 삼키는 불로 제 피를 태우소서. 제 것이 아니기에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 가지소서. 다 가지소서. 제 생명을 세상을 위한 희생으로 부으소서. 피는 주님의 제단 앞에 흐를 때만 같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저로 분기점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제가 접하는 사람들을 결단의 기로로 이끄소서. 저는 직선 도로에 표지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갈림길로 삼아 주소서. 그리하여 사람들이 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어느 쪽으로든 하나를 택해야만 하게 하소서.

짐 엘리엇의 기도문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 철저하게 자신을 드리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은 주님이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자신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갑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잘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을 위해 행하셨던 기적을 근거 삼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기 전까지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사가 되는 제 1조건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나의 소유권을 그분께 온전히 드렸다는 뜻입니다. 내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명확한 증거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나의 소유권을 온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의 소유가 된다는 의미

제자의 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인용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가족을 미워하는 나쁜 사람이 되라는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주님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심지어 나의 목숨조차도 주님과 경쟁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다음 문장에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 있습니다. 나는 부모님께 속하기를 더 원하고 배우자 또는 자신에게 속하기를 더 원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께서는 '너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소유가 될 때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의 소유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책임지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될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영으로 인해 기뻐하는 존재로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본회퍼의 묵상집에 이 부분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았을 때 우리는 오직 그 분만의 사람으로 귀속되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그분과 함께 갈릴리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길을 걷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의 길을 걷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의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세속적인'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영적인' 소망을 선택합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행동 방식을 따르려는 의지에서 나왔다면 이 모든 것은 똑같이 중요하고 타당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부적절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일을 통해 그리스도계 영광을 돌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증인은 무엇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기쁨이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기 전에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이 먼저 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선교의 비밀은 '나는 그분의 것이라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통해 그분의 사역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주님을 위해 무언가 하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온전히 '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삶을 성령께서 이끄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도전, '우리가 온전히 주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그 사실을 우리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며, 주의 일을 위해 많은 것들을 애쓰며 살아갑니다.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 먼저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이 있습니다. "네가 온전히 주의 것이 되었는가?" "우리들 속의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감격이 살아있는가?" 오늘 이 말씀을 부여잡고 주님을 위해 무엇을 열심히 하는 존재가 되기보다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인하여 먼저 기뻐할 수 있는 그 감격을 다시 한번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우리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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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부어 드릴 수 있습니까?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사무엘하 23 장 16절


최근에 당신에게 '베들레엠의 우물물'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 우정, 영적 축복입니까? 당신의 영혼이 위험할 정도로 당신의 만족만을 위해 그것을 취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부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갈망하는 것들로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해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당신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면 오히려 그 축복은 당신을 부패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부어드려야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낭비처럼 보입니다.
주님께 어떻게 본능적인 애착과 영적 축복을 부어드릴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방법은 마음을 결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행하는 어떤 귀한 행위를 그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행위를 갚는 것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즉시 "이는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주님께 부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 귀한 것들이 그 주변을 생수의 강으로 넘치게 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들을 주님 앞에 부어 드리지 않는다면, 이것들은 나의 탐욕이 되기 때문에 나 자신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합니다. 우리는 더럽고 사악한 것이 아닌 것들을 향해서도 탐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주님께 부어드려야 하는 변화의 지점까지 이르러야만 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한을 품고 마음이 상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축복을 자신만을 위해 움켜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주님께 부어 드린다면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멋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언제나 당신 자신만을 위해 축복을 움켜쥐고 주님께 그 축복을 부어 드리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통해 그들의 지경을 넓히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3일 주님께 부어 드릴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받은 축복을 다시 주님께

오늘 묵상에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말이 등장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묵상에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거하실 수 있다면 우리도 베들레헴이 될 수 있다라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오늘 묵상에서는 우리 안에 베들레헴의 우물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먼저 챔버스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위험할 정도로 당신의 만족만을 위해 그것을 취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부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무엘하 23장은 죽음을 앞둔 다윗이 지나온 날을 회고하는 장면입니다. 그의 삶에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블레셋의 소유였는데 열악한 싸움의 환경 가운데서 부하들이 몰래 적진인 베들레헴에 들어가 우물에 물을 떠서 다윗에게 가져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물을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하들의 목숨을 건 충정, 축복의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이 광경을 챔버스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당신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면 오히려 그 축복은 당신을 부패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부어드려야 합니다.
부하들이 생명을 걸고 가져온 물을 부어버린 다윗의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축복, 즉 베들레헴 우물에 물이 부어질 때 하나님은 다윗을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이 또한 '거룩한 낭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구해온 물을 자신을 위해 먹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습니다. 부하들의 희생을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다윗이 부하들의 수고를 착취하는 이기적인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하들을 사랑하는 왕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자신의 욕구를 위해 사용한다면, 그 축복이 우리를 부패하게 만들 것입니다.

받은 축복이 탐욕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받은 축복이 탐욕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챔버스는 의외로 '마음의 결심'이라는 간단명료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우리의 결심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을 때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왜 낭비하는가'라고 수군거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 주님을 사랑해서 한 행동이었다면 다윗이 생명과도 같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여호와의 전에 부어 드린 것 역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부하들이 떠온 생명과도 같은 물을 받고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는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고 가치가 있다. 바로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는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주님께 부어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 귀한 것들이 그 주변을 생수의 강으로 넘치게 합니다.
황형택 목사가 쓴 [언제나 희망은 남아있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축복이 흘러넘치게 한다는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읽어드리죠.
'헤비타트 운동'은 전 세계 무주택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려는 취지로 시작됐다. 창립자는 밀러드 풀러(Millard Fuller)로 법률가이자 사업가로 성공한 백만장자다 그러나 그는 돈만 추구하다가 가정적인 위기는 물론 영적인 위기를 맞으면서 돈이나 지위가 인생의 성공을 가져다주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부유한 삶이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는 원인이 된다고 판단하고,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자!'라고 결단했다. 이렇게 해서 헤비타트가 탄생했으며 그들은 지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운동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정말 어려운 가정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집을 짓는 것이다. 거저받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고 일하며 값진 땀을 한 동이씩 쏟아낸 후에야 비로소 자기 집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집이 완공되면 입주 가족은 건축비를 상환해야 한다. 집값은 소득층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또한 모든 입주자는 이후 헤비타트의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 입주자들도 받은 만큼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처럼 나눠주는 복된 인생이 헤비타트의 진정한 목표다. 내 집을 마련하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내가 남을 위해 집을 짓는 수고를 하는 것, 그래서 나누는 삶을 끊임없이 실천해 가는 것이다.
챔버스의 글을 묵상하며 가슴 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내 안에 머무르게 한다면, 탐욕이 되고 때로 그 축복이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 반면에 주님께서 주어지시는 사랑을 아낌없이 내어놓고 흐르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축복을 멋지게 사용하시리라는 사실입니다.
축복을 나 혼자 소유하는 것이 왜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할까요?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떠 온 물을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벌컥벌컥 마셨더라면 그의 부하들은 또다시 목숨을 걸고 물을 가지러 가지 않았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축복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다음에 챔버스의 글은 제가 조금 의역을 해서 바꿔봤습니다. 만일 당신이 받은 축복을 움켜쥐기만 하고 주님께 그 축복을 부어드리지 못한다면, 당신과 가까운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기회를 배우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축복이 내 안에 머물러 탐욕이 되게 하든지, 흘러넘쳐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든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축복을 묵상합시다.
그 축복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챔버스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도전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받은 축복을 부어줄 수 있는가? 너희들이 받은 축복을 나눠 줄 수 있는가? 너희들이 받은 축복을 누군가에게 흘러넘치게 할 수 있는가?
오늘 다윗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도전입니다. 목숨을 걸고 물을 떠온 부하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림으로 축복이 흘러넘치게 했던 것처럼, 오늘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우리 인생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그 축복을 기꺼이 흘러넘치게 할 수 있는 그래서 누군가에게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생명을 깨뜨릴 시간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한복음 7장 38절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복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자는 그가 받은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자기실현과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사람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과 정확하게 같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은 자신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가장 귀한 것들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고 좋은 포도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포도즙을 짜내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볼 때, 우리는 성공으로 우리 삶을 평가해서는 안 되며,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부으시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우리는 전혀 평가할 수 없습니다.
베다니에 마리아가 귀한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이는 누가 보아도 아무 의미가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를 낭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터무니없는 낭비처럼 보이는 헌신을 칭찬하시며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저런 계산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죽게 다 드린 마리아가 했던 행위를 우리도 할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생명을 쪼개셔서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를 위해 우리의 생명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 믿는 자를 통해 흐르는 생수의 강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의 생명들이 끊임없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금은 생명을 깨뜨릴 시간입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욕구를 멈추고 모든 것을 주를 위해 쏟아부을 때입니다. 주님은 "누가 주님을 위해 이 일을 할까"라고 묻고 계십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9월 2일 생명을 깨뜨릴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소모되어야 할 생명

오늘 묵상에서는 주님을 믿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참 좋습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죠. 요한복음 7장 38절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셨나요?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칩니다. 주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신 복을 가두어 두지 않고 받은 복을 흘러 보내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과 정확하게 같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흘러 보내셨습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소모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통로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통로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표현에 의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가장 귀한 것들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공이라는 말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다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부으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비유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고 좋은 포도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포도즙을 짜내시는 것입니다. 포도는 자신의 형체를 그대로 유지한 채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즙은 완전히 으깨져 형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포도는 오롯이 자신만의 형체를 가지지만 포도즙은 어디에 부어지느냐에 따라 모양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히 으깨서 주님과 정확하게 같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묵상을 준비하던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역하시는 김현주 선교사님의 선교 편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보다 더 심각한 코로나의 위험 가운데서 쓰신 편지였습니다.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합니다.
남아공, 특히 제가 살고 있는 웨스턴케이프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코로나19 환자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남아공 확진자 11,350명 중 절반이 넘는 6,200명이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나왔고, 5월 13일 하루에만 460명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다시 강력한 5단계로 곧 돌아가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공포는 엄습해 오고 있지만, 아직 철모로는 빈민촌의 아이들은 마스크 없이 뛰어다니고 있고,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그분의 용기로 몇몇 선교사들은 빈민촌에 들어가 지금도 음식 꾸러미를 나르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의 식료품을 나르고 있습니다만 그분의 은혜로 오늘까지 저도 4차에 걸쳐 식품 꾸러미를 무사히 나누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데 그저 부어지는 포도주라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챔버스의 마음이 저에게 또 이렇게 느껴졌습니다. 믿는 자를 통해 흐르는 생수의 강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의 생명들이 끊임없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금은 생명을 깨뜨릴 시간입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욕구를 멈추고 모든 것을 줄을 위해 쏟아부을 때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으깨진 포도즙처럼 생명을 깨뜨리고 자신을 소모하여 주님을 위해 쏟아질 때, 우리를 통해 생수의 강이 흘러갑니다.

낭비가 아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깨뜨려 부었던 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이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도리어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9절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계산적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다 흘러 보냈습니다. 주님은 이런 마리아의 행동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계산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흘러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스스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생명까지도 다 흘러 보내는 것이 낭비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주님이 부르신 목적에 따라 우리의 모든 것을 깨뜨려 쏟아붓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짐 엘리엇이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거룩한 낭비를 위해 생명을 깨뜨릴 때 우리를 사명자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원 제목이 희생의 성례전(The sacrament of sacrifice)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목을 가지고 묵상을 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성례, sacrament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주님을 기억하는 의식, 그것이 성례입니다. 우리가 희생하며 생명을 깨뜨릴 때 그것은 성내가 됩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죠. 주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순전한 헌신]이라는 책에 보면 미국 식민지 시대 원주민 선교를 위해 헌신하다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브레인 어드의 설교 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의 결론으로 좋을 것 같아서 그 설교 한 대목을 소개하며 묵상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께 전부를 드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저의 천국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사모하는 하늘나라이자 저의 신앙이요 행복입니다.
제가 천국에 가는 목적은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천국의 어느 곳에 머무느냐, 그곳에서 높은 지위를 얻느냐, 낮은 지위를 얻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제가 천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이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다면 그 모두를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의 생명을 온전히 깨뜨리는 헌신이 곧 주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성례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오늘 주님을 위해 무엇을 깨뜨리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가장 큰 축복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치도록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나를 깨뜨리지 않으면, 향유 옥합을 깨뜨리지 않으면, 내 속에 축복이 고여 흘러 너무 칠 수 없기에 오늘 우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나를 깨뜨리기를 소원합니다. 나를 깨뜨리는 것이 낭비와 손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침이 우리에게 복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깨뜨릴 때 나를 희생할 때 그게 곧 성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흘리고 찢겨주신 놀라운 성례가 됨을 우리들 기억하게 하여 주셔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 가운데 성례전이 이루어지는 역사를 경험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실 주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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