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지침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마태복음 7장 9절


위 말씀에서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기도의 예화는 선한 것을 구하는 선한 자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말할 때 마치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처럼 말합니다. 결코 당신이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그냥 자리에 앉아 있지 말고 응답되지 않은 이유를 여러 영적 지침을 펼쳐서 찾아보십시오. 당신의 아내 혹은 남편과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동료들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당신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좋은 자녀"입니까? "오 주님, 저는 짜증을 냈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영적 축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좋은 자녀의 자세'를 가질 때까지는 그 축복 없이 지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따지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헌신으로 오해합니다. 우리는 영적 지침을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빚진 돈을 갚지 않으면서 그것을 갚기 위해 구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구하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속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서 내게 자유를 달라고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하지 않았습니까?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았습니까?
우리는 오직 거듭나무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오직 빛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의 좋은 자녀가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도를 종교적 상투어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감정의 문제가 되었고 하나님과의 '신비'한 체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안개를 만드는 데 전문가들입니다. 우리가 영적 지침을 펴본다면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뚜렷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친구와의 관계, 갚지 않은 빚, 혈기를 부린 것 등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지 않는 한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예수님은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24일 영적 지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기도에 대한 묵상 내용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7장 9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 처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마땅한 하나님의 자녀가 선한 것을 구하리라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무조건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과 응답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많이 쓰는 방법 중 하나가 떼를 쓰는 것이죠. 그런데 정당한 근거 없이 떼쓰는 것은 훨씬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하면 안 되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떼를 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부모라면 쉽게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떼를 쓰면서 구하는 것이 정당한 지가 중요한 일이죠. 조정민 목사님이 쓴 [왜 기도하는가?]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가 없고 기도하지 않는 성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기도가 아니라면, '주여, 주여' 아무리 소리 높여 부르짖은들 주님이 귀 기울이시겠습니까? 도무지 듣지 않으시고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이 영적 지침이라는 것인데 원문에 보면 The  spiritual index.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덱스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인덱스라고 하는 말은 그런 의미죠. 지시하는 것 혹은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알기 위해서 찾아보라라고 할 때 인덱스를 보라 이렇게 쓰는 말입니다. 즉 영적 지침이라는 제목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그냥 자리에 앉아있지 말고 응답되지 않은 이유를 여러 영적 지침을 펼쳐서 찾아보십시오.
혹시 삶에서 부부 친구 자녀와의 관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좋은 자녀인지 아닌지를 보여줍니다. 삶의 모든 관계가 어그러진 상태인데 스스로 하나님의 좋은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적 축복을 원한다 해도 그것을 얻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러한 축복 없이 지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축복의 자격을 얻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제가 소개한 적이 있는 책입니다. 홍민기 목사님이 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혹시 이 문장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신앙에서 가장 나쁜 것은 소신껏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못된 것은 자기가 중심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타락한 것은 자기의 원하는 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는 영적 지침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영적 지침이란,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한 나에게 이유가 있음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착한 자녀 되기

이 문장이 잘못된 기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죠. 우리는 하나님께 따지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헌신으로 오해합니다. 다시 한번 읽어드릴게요. 중요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따지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헌신으로 오해합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후에 헌신이라고 착각하며 하나님께 대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다른 사람에게 진 빚은 갚지 않으면서 자신이 더 갖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더 많은 자유를 구하는 것, 다른 사람의 과실은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 다른 사람과의 깨어진 관계는 회복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 여기서 다시 인덱스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좋은 자녀인지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까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정욕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잘못된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도를 종교적 상투어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감정의 문제가 되었고 하나님과의 신비한 체험이 되었습니다. 영적 지침을 펴본다면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뚜렷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하는 다락방이라는 잡지가 있죠. 2021년 올해 5, 6월호에 보면 캐롤 퍼브스의 글이 실려있습니다. 오늘 묵상과 연결이 되는 부분이라 제가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특히 자동차 설명서를 읽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안개등이 필요하거나, 사이드미러를 조정하는 방법이 궁금할 때, 또는 1년에 2차례 시간을 바꿔야 할 때 저는 차를 도로 옆에 세워두고 사용설명서를 찾기 위해 더듬거립니다. 제가 읽지 않는 사용설명서에 그 모든 답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읽기는 했지만 적용하는 것을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사용 설명서는 바로 성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도록 돕는 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서가 모든 상황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충실하게 사는 데 필요한 지침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성서를 책장에 꽂아 놓기만 하고 읽지 않으면 , 그 책은 제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 설명서처럼 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성서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길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체와 적용한다면, '성서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인덱스가 될 수 있습니다.'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영적 지침서를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서 드리는 기도는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비로소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현실이 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에게 필요한 영적 지침서는 무엇인가요?
지금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성경 말씀을 펼쳐 보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 응답되지 않는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척 곤고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챔버스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무엇이 잘못됐는지, 영적 지침서를 찾아보아라. 무엇보다 기도하는 내용과 기도하는 삶 가운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오늘 하루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관객 가운데 올바른 응답을 체험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장 6절


예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를 꿈꾸라"고 하지 않으시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의지의 노력입니다. 은밀한 곳에 들어가 문을 닫은 후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을 정상적으로 활동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기도의 첫 번째 갈등은 방황하는 생각들입니다. 혼자 기도할 때 가장 큰 싸움은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생각들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훈련해 의지를 가지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위해 특별한 장소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곳에 가서도 우리의 마음은 날파리 같은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조용한 시간이란 모든 감정의 문을 의도적으로 닫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계시며 은밀한 곳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듯이 또는 우리가 자신을 보듯이 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은밀한 가운데" 살아갈 때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며 ,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아버지는 은밀한 곳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모든 환경의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가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매일 잠이 깨는 첫 순간에 당신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당신은 온종일 잘못된 차원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고 당신의 아버지께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면 모든 보이는 일마다 하나님의 임재의 흔적이 남을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23일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십시오!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집중하기

은밀한 곳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이기에 모든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만을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기도할 때 가장 큰 싸움은 방황하는 생각들을 극복하는 싸움입니다.

특별한 장소에서

오늘 묵상에서 은밀한 이란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챔버스의 글이죠.
은밀한 조용한 시간이란 모든 감정의 문을 의도적으로 닫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계시며 은밀한 곳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은밀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본문에 '문을 닫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모든 생각의 문을 닫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곳이 은밀한 곳입니다. 은밀한 시간입니다. 은밀한 곳은 우리가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이자 장소입니다. 이것저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밀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신다'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그러면 모든 환경의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가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이 문장을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이 열려있는 곳에서는 온갖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많은 것에 우리의 관심이 분산됩니다. 하지만 모든 문을 닫고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오로지 주님과의 관계 속에 설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문제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침 일찍 묵상으로 하루를 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루를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오롯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온종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은밀한 시간에,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흔적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최용우 씨가 운영하는 햇볕 같은 이야기 홈페이지에 보면 <한국 교회의 기도가 외식하는 기도에서 골방 기도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라는 글이 실려 있어요.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고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니라•••" '외식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크리테스'의 뜻은 연극배우입니다. 연극배우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기 위한 미사여구의 기도는 '외식하는 자'의 기도일 뿐입니다.
사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묵상에서 은밀한 기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서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형우 씨가 지적한 대로 그동안 한국 교회는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보다 청언하는 기도에 더욱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동거하기보다는 내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을 초청하는 기도에 더 매달렸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기보다 늘 환경을 바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현재 상황을 부정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챔버스의 묵상 글이 마지막 문장으로 참 좋습니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고 당신의 아버지께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면 모든 보이는 일들마다 하나님의 임재의 흔적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은밀한 곳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이기에, 모든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만을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에게 은밀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오로지 하나님만을 독대하는 은밀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도의 가르침에 주목합니다.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만 마주할 수 있는 그 시간 가운데 기도하는 그 기도를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우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기를 원했고, 우리는 우리의 현재 상황 가운데서 늘 우리의 상황이 바뀌어지기를 위해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이 상황 한가운데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하게 고백되겠습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 오늘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들의 성도들 가운데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에 한가운데서 은밀한 시간과 은밀한 장소를 경험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나는 ••• 그러나 그는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해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태복음 3장 11절


"나는 ••• 그러나 그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 순간이 올 때까지는 나는 성령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십니다. 나는 그분의 오심에 대해 준비되어 있습니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주님 오시는 그 길을 막는 한, 예수님은 오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나는 주님께서 내가 잘못한 모든 것들을 빛으로 끄집어내실 것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오시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내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곳마다 주님은 찾아오셔서 일하십니다. 내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주님께서는 그분의 발을 거두십니다.
회개란 죄에 대한 감각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회개할 때 내게는 철저하게 아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의 신발을 들기에도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이와 같은 회개를 했습니까? 아니면 나를 변호할 생각들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들어오실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아직 온전한 회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성령세례를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희를 세례 할 것이요." 성령 세례를 받은 자의 유일한 의식적 경험은 자신의 절대적인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신이 끝나는 곳, 그러나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행하시는 곳으로 나아가십시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22일 제목이 특이합니다. "나는 •••그러나 그는"
오늘도 2가지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주님만이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시점에 분명하게 깨달았고 그것을 인정할 때 세례 요한은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러나 그는"이라는 묵상 제목이 본문의 상황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쓴 [오늘 제자로 살기]에 보면 크리스천의 여행은 DIY가 아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제가 좀 읽어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셨다. 심지어 우리는 스스로 예수님을 따를 능력조차 없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면서 매일같이 도우실 성명을 보내셨다. 우리 힘으로 이를 악물고 따라간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해 크리스천의 여행은 DIY 프로젝트가 아니다.

여기 DIY라고 하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입니다. Do it youself, DIY는 내 스스로 해라 라고 하는 말의 약자입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자신의 힘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카일 아이들먼 목사는 크리스천의 여행이 DIY, Do it youself 프로젝트가 아니며 주님을 따라갈 힘조차 없는 우리이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완전히 끝나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그러나 그는'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성령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 신앙에서 '나는 할 수 없는데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일을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오셔서 일하실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죠.
주님이 일하시는 곳은 우리가 무기력함을 깨닫고 주님의 도심을 구하는 곳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때는 우리가 더러움을 인정할 때입니다.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면 우리의 모든 잘못이 빛 가운데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이 모든 순간에 주님이 일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DIY(Do It Youself)가 아닙니다.

회개가 필요하다

주님께서 일하시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오늘 묵상글에 조금 오역이 있어서 제가 다시 의역을 해 보았습니다.
회개란 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부분이 쉽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순간 우리에게 죄의식이 아닌 무력감이 찾아온다니 말입니다. 가만히 묵상해 보니 이해가 됩니다. 회개는 죄의식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죄의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죄의식 때문에 회개하게 되고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 하지만 회개의 순간에는 죄의식이 아니라 무력감이 찾아옵니다. 죄의식 때문에 회개를 했는데 회개하고 나니 우리가 너무 무력한 것이죠. 회개라는 말이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니 우리 존재가 초라해집니다. 철저하게 무능력한 모습이 보이는 것이죠.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회개의 명확한 표식 중 하나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와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세례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로써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챔버스의 글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의 유일한 의식적 경험은 자신의 절대적인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수상을 지낸 유명한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는 [하나님께 가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 안에 (성령의 인재를 경험하는) 이 성향을 나누어 주셨다. 오직 죄 때문에 이 성향이 방해를 받아왔다.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해 하시는 일이 바로 이 성향을 회복하는 것이다.
••• 그때에는 사람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된다. 그러나 아직은 아주 순전하게 누릴 천국의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때가 되면 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죄인으로 지냈다는 것에 대한 기억까지 우리에게서 제거되어 깊은 바다에 던져질 것이다.

여기서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활동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무지와 어둠과 무가치함 때문에 성령께서 이처럼 영광스럽게 내주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사실 사이의 대비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세례요한의 고백과 경험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절망이 아니라 주님이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지점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성령의 영광이 강할수록 나의 무가치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성령님 앞에서 당신의 무가치함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당신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는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았는지, 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배웠습니다. "나는 ••• 그러나 그는" "나는 무기력합니다.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보니 주님 앞에서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무가치함 가운데서 우리들이 고백하는 것, 그러나 그는 주님은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삶과 오늘 하루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일하심을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눈에 뜨이지 않는 섬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


성경은 우리 기준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주목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문자적으로는 "가난뱅이는 복이 있나니"라니! 너무나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설교는 의지력 및 인격의 아름다움과 같이 눈에 쉽게 띄는 것들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문구인 "예수 그리스도를 돕기 위해 결단하세요"라는 말은 주님께서 절대로 원하지 않으시는 내용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복하라고 하셨고, 주를 돕기 위해 결단하도록 요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 둘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바탕에는 평범한 것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내가 복 있는 이유는 나의 가난 때문입니다. 만일 내게 의지력도 없고 드러낼만한 고상한 성향도 없을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는 그 가난을 통해 내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가난뱅이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아름다운 성품은 언제나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교만 또는 비기독교적인 것입니다. 만일 '내가 유용한 존재인가'에 초점을 두기 시작하면 나는 곧 주님의 풍성하신 손길을 잃게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만일 내가 그 흐름의 양을 검사하고 있다면 주님의 손길을 놓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스스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의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눈에 띄지 않고 절대로 의식되지 않습니다. 만일 의식된다면 이는 예수님의 손길의 특성인 순수한 아름다움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를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님은 평범한 것들을 통해 영적인 일들을 만들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21일 눈에 띄지 않는 섬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 묵상 녹화를 하기 위해서 들어오다가 한 번도 이렇게 주의해서 보지 않았던 저 뒤에 걸려있는 액자를 보게 되었어요. 저기에 보면 그런 글이 적혀 있네요.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 출판된 지 75년을 기념하여라고 하면서 1300만 명 이상이 이 책을 읽었다. 즉 1300권 이상의 책이 팔렸다라고 하는 액자를 보게 되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계속해서 올 한 해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고 있는데, 여러분들 눈에 보이지 않는 1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이 책을 묵상하며 영적 교감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이 영적 교감을 누리고 있구나' 이 사실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힘을 주는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완전한 가난

성경 말씀과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는데 실제 삶에서는 우리의 의지력이나 인격의 아름다움을 강조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죠.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문구인 '예수 그리스도를 돕기 위해 결단하세요'라는 말은 주님께서 절대로 원하지 않으시는 내용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항복하라고 하셨고 주를 돕기 위해 결단하도록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까요? 왜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우리의 의지력이나 인격적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자랑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주님께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을 항복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을 주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노력이 우리를 무척 곤고하게 만들 것입니다. 도저히 잃을 수 없는 일에 헌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반면 우리가 주님께 가난함을 고백할 때 동시에 온전히 은혜를 요청합니다. 그때 은혜를 누리는 삶이 시작됩니다.
오늘 묵상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완전한 가난을 향해 나아가는 만큼 우리의 신앙이 온전해지고, 주님과 친밀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온전히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완전한 가난뱅이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의식하지 않는 상태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요한복음 7장 38절에 나오는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생수의 양을 검사하고 있다면 주님의 손길을 놓치는 것이죠. 챔버스가 말하는 고귀한 신앙의 단계는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단계입니다. 만일 남에게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나는 유용한 존재인가를 생각한다면 주님의 손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묵상에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정상인데 이렇게 말하니 말입니다. 챔버스의 글이죠. 그리스도인의 삶은 눈에 띄지 않고 절대로 의식되지 않습니다. 만일 의식된다면 이는 예수님의 손길의 특성인 순수한 아름다움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이해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셨던 바리새인들은 늘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시도했던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스스로 드러낼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의 신앙을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외적으로 어떻게든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자랑하거나 과장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람들이 알아줄 때와 알아주지 못할 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에 띄는 특별한 일들에 더욱 신경을 쓰려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의미를 찾고 영적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챔버스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스스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의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눈에 띄지 않고 절대로 의식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은 스스로 '나는 영향력이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를 과장하거나 자아가 팽창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눈에 띄지 않고 의식되지 않지만 인격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진짜 영향력이 드러납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인재연습]에 보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식이 없어도 일상에서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로렌스 형제는 천성적으로 부엌일을 굉장히 싫어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친숙해지게 되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일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부엌에 배치되어 섬겼던 15년 동안 부엌일이 너무 쉬워졌다고 말합니다.
로렌스 형제에게는 수도원에서 기도하라고 정해놓은 시간이 다른 일과 시간이랑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영적인 피정을 떠나 기도에 전념하라고 명령하면 순수히 따르기는 했지만, 따로 기도 시간을 갈망하거나 일부러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분주한 일을 감당하고 있더라도 온통 하나님께만 몰두하는 상태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섬김은 평범하고 순수하며 무의식적인 일상에서의 섬김이 아닐까요? 챔버스의 묵상글을 보며 로렌스 형제가 떠올랐던 이유입니다. 부엌일을 섬기는 그의 모습과 작은 자에게 한 아주 보잘것없는 섬김이 평범한 것들을 통해 영적인 일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바탕에는 평범한 것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아름다운 성품은 언제나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남을 의식하지도 않고, 남에게 의식되지도 않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스며듭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은 사람들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있습니까?
위선적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점검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완전히 가난한 자가 되라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라고 그리고 또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합니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그런 섬김의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늘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 때문에 행동하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모습인지 우리를 점검케 하여 주옵시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식한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구나' 우리의 신앙을 점검케 하여 주셔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진정한 친밀함,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아도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신앙을 꿈꾸며 준비하며 기도하는 오늘 하루 우리 귀한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온전한 삶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당신의 삶을 분열시키는 것이 생길 때마다 당장 주님께 나아와 안식을 주실 것을 구하십시오. 평안을 깨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마십시오. 평안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지 말고 그 평안을 깨는 대상과 대항해 싸우십시오. "주님, 제 안에 당신만을 의식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자아의식은 사라지고 주님께서 당신의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자아의식이 계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자아의식은 서서히 자기 연민을 발생시키며 자기 연민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쎄, 그들이 나를 오해한 것이지. 그들은 내게 사과해야 해. 그 점은 내가 분명하게 해야 할 것 같아."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께서 당신에게 그리스도 의식을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당신의 온전함이 완벽해질 때까지 주께서 당신을 붙드실 것입니다.
온전한 삶은 어린아이 같은 삶입니다. 내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정도라면 나는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건강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은 병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자신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묻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당신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의식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평안한 마음 가운데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상식적인 방법으로 자아의식을 극복하려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자아의식을 개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 의식이 자아의식의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곳마다 주님께서는 완성된 사역에 안식, 곧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는 안식을 허락하십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20일 온전한 삶이란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온전한 삶을 위하여

오늘 묵상본문은 어제와 동일합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자아의식'이라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분열을 치유하는 최고의 방법은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임을 알았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상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감으로 인하여 가지는 상태, 온전함 completeness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깨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고 강력하게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만을 의식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자아의식은 사라지고 주님께서 당신의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자아의식이 계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자아의식은 서서히 자기 연민을 발생시키며 자기 연민은 사탄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자신을 의식하면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게 됩니다. 챔버스는 자아의식이 계속될 때 자기 연민이 발생하니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매기는 분은 인생의 전문가이신 하나님이며 우리 스스로 가치를 폄하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재욱 목사가 쓴 [보통의 질문들] 그 책에 나오는 글이 있습니다. 좀 읽어드리죠.
<전당포의 사나이들>이라는 프로그램은 물건을 팔러 온 사람들과 가치를 두고 흥정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물건을 팔러 온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어떤 이는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매기는 것은 결국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의 몫이다.
나의 의미와 가치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여 자만에 빠지는 사람도 있고 너무 과소평가하여 좌절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내 인생에도, 남의 인생에도 전문가가 아니다. 인생의 전문가는 바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다.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인생전문가이신 하나님의 평가로 결정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상상 그 이상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가치를 매기셨다.
우리들에게 온전한 상태는 무엇일까요? 챔버스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자신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묻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당신의 뜻입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현학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지만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이 산소를 의식하지 못하고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산소가 희박한 곳에서 숨 쉬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물고기들은 물에서 나오고서야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되죠. 우리 역시 하나님과 멀어지고 나서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책, [예수의 글]에도 이런 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되 놀라울 정도로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내 안에 한 몸처럼 사신다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구약에서 우리 여정에 동행하셨고 신약에서 성육신 하여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셨으며, 이제 우리 숨결 속에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호흡한다.
호흡보다 친밀한 교감을 상상할 수 있을까? 호흡은 워낙 몸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늘 내가 숨을 잘 쉬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워낙 긴밀하여 내 호흡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긴밀성을 택하여 우리의 숨결이 되셨다. '영'의 헬라어인 '프뉴마'는 숨결을 뜻한다.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 때는 굳이 주님의 뜻을 묻지 않아도 평안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꾸 주님의 뜻을 묻기 시작했다면 주님과의 관계가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는 의미이겠지요.
조금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도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의식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평안한 마음 가운데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 중에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를 읽어 드리려고 하니까 혹시 여러분들 이 가사를 들으면서 찬양으로 따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어제 묵상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자아의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장애물입니다. 만일 자아의식을 가지고도 온전한 그리스도 내 삶을 살 수 있다면 더욱 자아의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아의식이 있던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식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로지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아도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에게는 원하는 것, 바라는 것, 기도하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게 많아서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원하는 것 바라는 것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나에게 평안이요 기쁨이요 만족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 원하는 것, 바라는 것 없어도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구나.'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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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식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1장 28절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자아의식의 습관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아의식은 하나님 안에서의 온전한 삶을 가장 먼저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은, 계속적인 내면세계 속에서의 씨름을 만듭니다. 자아의식은 죄는 아니지만 신경이 과민할 때나 갑자기 새로운 환경에 던져질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하도록 온전하게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참근한식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당장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적 과민성은 무시한다고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계 나아감으로 치료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자아의식'이 아닌 예수님 의식을 갖게 해 달라고 간과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우리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당신의 삶을 분리시키려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방치해 두지 마십시오. 곁길로 빠지는 것을 조심하고 친구 및 환경의 영향이 당신의 삶을 분열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주님과의 하나 됨을 파괴하여 당신을 분리된 자아로 보게 하려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영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해답은 이 간단한 명령에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 우리의 지적, 도덕적, 영적 실체의 깊이는 이 한 말씀으로 측정됩니다. 우리가 실체와 분리되는 만큼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자신의 자아의식의 세계 속에서 끝없는 논쟁을 하려고 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19일 자아의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이런 주제를 가지고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자아의식 vs. 예수님 의식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할 거 같습니다. 흔히 자아의식이라고 하는 영어로 하면 셀프 컨셔시니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그 의미가 쓰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묵상에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파괴하는 아주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자아의식'이 아닌 '예수님 의식'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우리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게 하실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아의식은 예수님 의식과 대척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아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 때는 자아의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시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러한 일상적인 신앙을 뒤흔드는 것이 있습니다.
챔퍼스는 이것을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면 옛사람이 다시 우리 안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8월 15일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증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거듭남의 증표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신앙적 관점입니다. 우리의 완전함을 흔드는 것은 자아의식입니다. 우리의 죄된 본성이 고개를 들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처음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낫을 피해 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죄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자아의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여 삶으로부터 우리 마음속에 있는 평화는 앗아갑니다. 이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루속히 관계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욥기]에서 토마스 에드워드 브라운의 시를 인용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면 좋을 것 같아서 이 시를 소개합니다. 좀 잘 생각하며 들으시면 좋을 거 같아요.
당신이 조개껍데기처럼 자신을 비울 수 있다면 주님은 당신을 대양 가운데서 찾아내어 "이것은 죽지 않았다"라고 외치실 것이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당신 아내 그분 자신을 채우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 자신으로만 가득 차서 악한 행동을 한다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은 속이 꽉 차 있구나 그냥 내어버려라 너무 작은데 꽉 차 있으니 나를 위한 여지가 없다"
문제의 해답은 우리 속을 주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어렵고 힘들 때 '정신 차려'라고 말하지만 신앙인은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바라봐라고 말해야 합니다.
제가 군복으로 사역을 할 때 일입니다. 군대에서 목사가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정신적으로 힘겨워하는 병사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인격 지도라는 이름으로 부대를 찾아다니며 강의를 하고 소위 문제가 있는 관심 사병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곤 했습니다. 종종 자살이나 탈영을 시도하는 병사 군에서 사고를 일으킨 병사를 만나 이야기하다 보니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정신으로 군 생활을 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에 입대할 때부터 군인 정신을 가져야 그 각오를 가지고 다져야 적응을 할 텐데 입대 전에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삶의 방식과 제정신을 버리지 못하니 군대에서 생활하는 것이 힘이 들었던 것이죠. 그때부터 제가 종종 했던 말이 있습니다. "군인정신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 말이 오늘 묵상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챔버스는 주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라고 했습니다. 외부의 공격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옵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공격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느냐는 것이죠. 챔버스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당신의 삶을 분리시키려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방치해 두지 마십시오. 곁길로 빠지는 것을 조심하고 친구 및 환경의 영향이 당신의 삶을 분열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주님과의 하나 됨을 파괴하여 당신을 분리된 자아로 보게 하려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영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아름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주님의 가장 위대하면서도 간단한 명령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그가 풍성한 진리를 깨달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잘못된 길로 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었는데, 진심으로 오직 주님만을 구하고 사랑함으로써, 내 자신과 주님을 둘 다 찾았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인자하시고 긍휼에 풍성하신 주께서 아무 공로도 없고 자격도 없는 나를 분에 넘치게 대해 주시고, 내가 소망하거나 구한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챔버스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이를 극복하려면 주님께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자기를 사랑하는 길로 갔다가 길을 잃었지만 주님만을 사랑함으로써 다시 자신과 주님을 모두 찾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엄밀한 의미에서 '자아의식'은 '예수님 의식'과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나를 주님과 멀어지게 하는 '자아의식'은 무엇인가요? 문제를 알면 답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간단하고 명료하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거라" 주님은 우리들에게 내게로 오라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종종 아니 우리의 삶에서 많은 부분이 내 생각을 가지고 내 계획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이렇게 해 보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한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요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나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 내 속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의 생각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으로 인하여 나의 삶이 주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이 소원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하나 됨을 고백하는 승리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혹시 헌신을 사랑합니까?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누가복음 18장 23절


젊은 부자 관원은 말없이 슬픔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의심도 없었고 그 의미에 대해 따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청년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 속에서 남들보다 부유하다고 느낀 부분들-성격, 개인적인 집착, 마음과 생각이 머무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임한 적이 있습니까? 그때 당신은 종종 슬픔으로 인해 말도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지도 않을 것이고. 애걸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문제의 지점에서 주님은 당신을 만나시고 단순히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실 것입니다. "네가 말한 것이 진심이라면 조건이 있단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눅 18:22).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소유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당신 홀로 서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아무 소유도 없는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곳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지를 다 드리는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당신은 주님보다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 것이라는 당신의 '생각'에 더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슬픔을 자아낼 주님의 거친 말씀을 듣게 될 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향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친 말씀들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하는 그 어떠한 타협도 허락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사람은 가난 속에서도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아의식이 너무 커져서 결국 예수님의 부르심까지 거절할 정도가 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의식이 너무 커져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다는 그 의식마저도 주님께 내려놓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지 못하면 이 부분을 통해 실망이 들어오게 됩니다. 실망은 자기 사랑의 환상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예수님께 자신을 드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드린다고 하는 자신의 '헌신'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18일 혹시 헌신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슬픔이 기쁨이다

어제 목상을 기억하시나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떠나간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묵상을 많이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이전에도 여러 번 접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청년이 나중에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완전히 실망하고 주님을 떠난 청년의 이야기만 나와 있지 그다음의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찢어지는 과정이 헌신의 첫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 원문의 제목은 '말 못 할 슬픔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Have you ever been expressionless with sorrow?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 못 할 슬픔이 무엇일까요? 부자 청년에게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완전히 낙심한 채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우리도 오늘 부자 청년의 입장에서 동일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챔버스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 속에서 남들보다 불효하다고 느낀 부분들-성격, 개인적인 집착, 마음과 생각이 머무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임한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삶에서 가장 집착하는 부분에 대하여 아주 직설적으로 물으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시지만 애걸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근심하고 낙담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그것을 버릴 수 있는지,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생각들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지,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지 말입니다.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슬픔과 낙담이었습니다. 혹시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그러한 슬픔과 낙담은 큰 기쁨이 됩니다. 슬픔과 낙담을 경험한 자만이 가장 진솔하게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슬픔에 직면해 보지 않고 말하는 것들은 때로 너무 피상적이고 가벼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가 느끼는 슬픔이 순종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실망해도 괜찮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라는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라는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니 부자 청년에게 그 순간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지를 드리느냐 마느냐의 내적 싸움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 헌신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참 표현이 흥미롭죠? 생각에 헌신하기 위해 고민한다는 것. 부자 청년 역시 전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해 영생을 얻으려는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한 헌신과 완전히 다른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자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당신은 주님보다도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 것이라는 당신의 '생각'에 더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슬픔을 자아낼 주님의 거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챔버스는 주님의 거친 말을 부드럽게 만들려는 시도가 타협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거칠게 말씀하실 때는 그 말씀으로 인해 마음이 아파야 하는 것입니다. 거친 말이란 요즘 시체말로 뼈 때리는 말이겠죠. 직설적으로 폐부를 찌르는 말씀의 칼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픔이 꼭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어서 스스로 무기력하다는 생각 역시 교만의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이유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면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니 말입니다.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부르심을 거절하는 사람이나 궁핍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궁핍하다는 생각도 대단하다는 생각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실망하는 이유는 그런 생각을 내려놓지 못한 채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로 실망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환상이 깨집니다. 힘든 주님의 말씀을 대하는 순간에 자기의 헌신이 얼마나 가짜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주님께 헌신했다고 여겼던 것들이 결국 자신의 헌신을 사랑한 증거가 되니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사랑과 주님 사랑을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네 모든 것을 팔아'와 같은 거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주님의 거친 말씀으로 인해 슬픔이 찾아왔다면 기뻐하십시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실망해도 괜찮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의 생각에 대한 헌신과 주님께 대한 헌신은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지금 당신의 삶에 '거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우리를 낙담하게 만드는 지점에서 찾아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 주님은 아주 거칠게 마음 아프게 뼈 때리는 말로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그 청년의 마음이 무엇인지 본질을 꿰뚫고 있는 주님의 지적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들이 슬픔을 느끼고, 우리들이 절망을 느낄 때에, 우리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여 떠나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한 우리에게 찾아오는 새로운 기쁨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 그런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강요하지 않으시는 주님

내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18장 22절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이 순종하기에 힘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많은 말씀을 하시지만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을 때 그분의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힘든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고 조금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붙잡으려고 애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고 내게로 와서 나를 따르라." 그분은 결코 속여서 덫에 빠뜨리는 일이 없으십니다. 단지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씀을 하시고 그 후 그대로 남겨두십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거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았습니까? 이 부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들었고, 무슨 말씀인지 분명히 붙잡았으며, 그 말씀은 그의 마음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완전히 낙심한 가운데 비통에 잠겨 떠났습니다. 그는 불같이 뜨겁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왔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그를 차갑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 청년으로 하여금 열광적인 헌신을 자아내는 대신에 가슴이 찢어지는 낙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떠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한 번이라도 들려지면 그 말씀은 조만간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중 몇몇은 주의 말씀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어떤 특별한 지점에서 주님께 헌신하기로 다짐할 때 주께서 진정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8월 17일, 강요하지 않으시는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도 2가지 주제로 나누어 봅니다.

너무나 힘든 말씀

오늘부터 이틀 동안 동일한 본문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부자 청년 관원의 이야기입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계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라고 하는 구절에 집중했다면, 내일은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심히 근심하더라'라는 구절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부자청년 관원이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순종하기에 참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챔버스가 말하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많은 말씀을 하시지만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을 때 그분의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힘든 말씀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든 이유는 단순히 따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순종하기 어려워도 강제로 요구하신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 관원을 붙들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모두에게 동일한 무게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그가 가진 삶의 가치관 때문에 더 순종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속여서 덫에 빠트리는 일이 없으십니다. 단지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씀을 하시고 그 후 그대로 남겨두십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아주 심한 말씀을 하시고 그대로 남겨두신다, 아마 어쩌면 오늘 우리들에게 무언가 도전이 되는 말씀은 우리들에게 가장 심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의 [예술을 위한 바보]라는 책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던 자신에게 찾아온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꽤 성공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회를 내려놓고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무 당황스러운 부르심이라서 약 14개월 동안 그 부르심을 거듭 확인한 후, 온 가족이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트레일러를 타고, 그는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대야를 붙인 나무 십자가와 세족에 필요한 물건들을 포함한 20킬로그램 정도가 넘는 짐을 짊어지고 거의 3,000 킬로미터의 대장정을 걸어 세족 사역을 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순례했고, 지금까지 20여 년이 넘게 그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에게 들린 명령이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씀은 아니었을까요? 14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유효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순종은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힘든 말씀입니다. 내용도 힘들지만 선택이 오롯이 우리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더 힘이 듭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그들이 아주 명확하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에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힘든 말씀에, 힘든 결정을 하고 순종의 길을 걷는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순전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강요된 순종은 결코 아름다운 헌신을 이룰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순종은 오롯이 우리의 몫입니다.

강요하지 않으시는 이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시는지, 오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합니다. 그가 근심하여 완전히 주님을 떠났으리라 가정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청년 관원이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으나 차갑게 식어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관점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는 주님께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완전히 낙심한 가운데 비통에 잠겨 떠났습니다.
제이슨 미첼이 쓴  [쉬운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도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좀 읽어드리죠.
사랑한다면 그냥 가게 놔두는 것이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억지로 끌고 가신다면 이 청년으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심으로 원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원망을 들을 수밖에 없다. 청년은 예수님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면 끊임없이 투덜거렸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가게 놔두시되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셨다.
선택의 몫은 청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말씀이 너무 힘들어 낙심하고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청년에게 억지로 헌신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 청년의 마음에 가슴이 찢어질 듯한 낙심을 주셨습니다.
조용한 묵상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쥐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한 번이라도 들려지면 그 말씀은 조만간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낙심한 채 주님을 떠나갔지만 그 청년의 마음속에 열매가 맺게 될 것입니다. 가능성을 유보하고 계신 모습에서 청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낙심한 채 떠난 청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들은 주님의 말씀이 심겨져 싹이 나고, 열매 맺는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참아주시고 기다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사랑 때문에 '내버려 두는 것'이 주님의 방식임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주님의 말씀에 아직 응답하지 못했습니까?
강요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순종을 원하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이 부자 청년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우리들에게 참 버겁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시면 따라갈 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오늘도 우리들에게 억지로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니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참 힘겹게 들려집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힘들지만 순종하기를 결정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기에 주님 순종케 하여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순종으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 길을 걸어가며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 귀한 주예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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