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하게 주의 것이 될 때까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4절


우리 대부분은 주요 부분에서는 모두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엉망입니다. 이는 죄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육에 속한 삶의 잔재들입니다.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것은 성령을 향한 모독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서든지 엉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관계가 옳아야 할 뿐 아니라 그 관계에 외적 표현도 옳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모든 구체적인 것까지 다 훑어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셀 수 없는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다시 같은 자리에 거듭 데려다 놓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자리에서 교훈을 배울 때까지 계속 우리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완제품을 생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일관적인 인내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시며 우리를 같은 특정한 문제의 자리로 계속 데려다 놓으십니다. 그 문제는 정신적 안일함일 수도 있고 자신만을 고려하는 이기적인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이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옳지 않은 이 한 가지를 계속 해결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놀라운 시간들을 가져왔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완전합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은 우리의 주요 부분에서는 주님과 바른 관계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야고보 사도를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인내로 완제품이 되게 하라." 곁으로 빗나가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오, 지금 당장 해야겠네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온전하게 주님의 것이 될 때까지 끝까지 그것을 지적하실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31일 온전하게 주의 것이 될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집트로 떠나기 3주 전인 1915년 6월 23일 캔버스는 성경훈련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늘 내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학교의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 어쩌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 학생들 앞에서 챔버스가 이 설교를 했으니 얼마나 결연한 내용이었겠습니까? 오늘 묵상은 온전하게 주의 것이 될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헤어지는 학생들을 격려하며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 1장 4절을 보세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에는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너의 인내로 완제품이 되게 하라' 곁으로 빗나가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오, 지금 당장 해야겠네요.' 이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온전하게 주님의 것이 될 때까지 끝까지 그것을 지적하실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어보겠습니다. 성경학교 학생들을 격려하면서도 권면하는 내용이죠.
우리 대부분은 주요 부분에서는 모두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엉망입니다.
주요 부분에서 모두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 육에 속한 나쁜 습관들이 남아 있어서 무절제한 행동을 한다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는 우리 삶을 통해 외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실 것입니다. 챔버스는 우리 신앙에서 과정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주니 말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구나. 우리의 인격과 삶이 온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지금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구나'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대의 신앙 고백을 기억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늘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길로 돌아선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더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워해야 마땅합니다.
더없이 거룩한 주님의 삶과 고난에 비추어 자신을 진지하고 경건하게 살피는 신앙인은 자신에게 꼭 필요하고 유익한 모든 것을 풍성히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 외에 나은 것을 도무지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마음에 들어오신다면, 이 모든 진리를 아주 빠르고 온전하게 배울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인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셀 수 없는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다시 같은 자리에 거듭 데려다 놓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자리에서 교훈을 배울 때까지 계속 우리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완제품을 생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부족해서 넘어지고 중간에 포기하고 그만두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하시며 우리를 다시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의 인내는 바닥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인내는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제품을 생산하신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우리는 불량품인데 우리는 미완성인데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완성품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말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 [목마름]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내하시며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18세기 미국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Colonial Williamsburg))라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많지만, 특히 은세공 작업장의 관심을 큽니다. 장인은 은덩어리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커다란 망치로 두들겨 됩니다.
무얼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은판이 넓어졌다 싶으면, 풀무에 집어넣습니다. 그때부터는 원래 만들고자 했던 물건이 나올 때까지 달구고 두들기기를 되풀이합니다.
달구고, 두들기고, 달구고, 두들기고...
마감에 쫓기고, 일에 눌리고, 말다툼에 휘말리고, 무시당하고, 귓전을 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쉴 새 없이 전화가 오고... 달구고, 두들기고...
금속 세공 전문가들을 뜻하는 영어 단어 'Smith'가 두드린다는 의미의 동사 'Smite'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은 세공사는 은을 때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일단 원하는 형태가 잡히면, 장인은 다시 때리고 문지르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작은 망치로 가볍게 두들기고 숫돌을 써서 갈아냅니다. 필요한 곳에 무늬를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작업하는 동안은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아무도 망치 잡은 장인의 손을 붙들고 "제발 가만히 좀 내버려 두세요. 너무 많이 두들겨 패는 거 아닙니까? 불쌍하지 않으세요?"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은 세공사는 원하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두들겨 댈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달구고 두들기고 때리면서라도 우리를 완성품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는 아직 미완성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완성품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십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나에게 아직 남아있는 모난 성품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다루어 가실 인생을 기대하며 인내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실 때까지 우리를 참으시고 인내할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내어놓고 하나님, 하나님 손으로 우리를 두드리고 또 때리고 우리를 만지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제품이 되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인내를 바라보며 우리도 참게 하시고 하나님의 인내를 바라보며 우리도 소망을 갖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질 나를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오늘 하루를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환란과 다스림과 또 고통과 연단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귀한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허상을 제거하는 훈련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요한복음 2장 24-25절


허상을 제거한다는 것은 삶 속에서 더 이상 잘못된 판단이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상에 속게 되면 우리는 냉소적인 사람이 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야박할 정도로 거칠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허상을 제거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을 그들 모습 그대로 보게 됩니다. 냉소함도 사라지고 날카롭거나 거친 말도 하지 않게 됩니다. 삶 속에서 발생하는 잔인한 많은 일들은 우리가 허상을 보는 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상대의 실제 모습대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한 내 생각에 따라 그들을 대할 뿐입니다. 내 생각에 따라 모든 것이 기쁘거나 좋을 수 있고 형편없거나 못날 수 있습니다.
허상을 제거하는 것을 거부함으로 인생사에 많은 고통을 야기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경우 우리는 사람에게서 모든 완벽을 기대하고 모든 철저함을 요구합니다. 이때 사람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잔인해지고 악감정을 품게 됩니다. 우리는 어리석게 그 사람이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 심층의 깊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관계에 관해 그토록 분명하게 엄격하신 이유는 주님을 향한 충성에 서 있지 못한 모든 인간관계는 결국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를 의심하지도 않으셨고 결코 악감정으로 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주의 은혜, 사람의 한계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완벽하셔서 주님은 누구에게도 절망을 느끼신 적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뢰가 사람에게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30일 허상을 제거하는 훈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허상의 문제

오늘 묵상 제목은 허상을 제거하는 훈련입니다. 허상이 무엇일까요?
오늘은 특별히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들을 다룰 것입니다. 아마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씀일 것 같고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또 그렇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람을 사람으로 알면 해결될 문제들인데 사람에 대한 허상을 가지고 있으니 자꾸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원 제목이 영어로 The discipline of disillusionment라고 되어있는데, 직역하면 '환멸의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환멸을 느끼는 훈련을 자꾸 할수록 주님께 가까이 갑니다. 아주 나쁜 의미가 아니고요.
사람에게 환멸을 느낄 때,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오늘 특별히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그런 묵상글이 될 것 같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깊은 경건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든,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든, 내가 사람들에게서 어떤 위로를 구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주위의 은혜를 진정으로 소망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위로를 받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이 주님의 은혜를 소망할 준비가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에게서 어떤 위로도 구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 즉 사람을 향한 헛된 기대로부터 느끼는 환멸은 주님께 나아가는 좋은 훈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허상을 제거하는 훈련을 하면 더 이상 잘못된 판단도, 그 판단으로 인해 실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상의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챔버스의 글이에요.
우리는 서로를 향해 상대의 실제 모습대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한 내 생각에 따라 그들 대할 뿐입니다.
내 생각대로 움직일 사람이 있는지, 내 기대를 채워줄 사람이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런 허상으로 인해 자꾸 실망합니다. 실망이 지나치면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생깁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감정이 상대방이 아니라 내 기분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대한 허상의 결과는 냉소적이고 차가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꾸 사람들에게 속다 보니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방어벽을 치고 차갑게 대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의 상처 대부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알지 못하여 생기는 의지하려는 경향 때문입니다.

허상 제거하기

허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사람을 신뢰하고 믿는다는 말이 여기서는 더 정확할 거 같습니다. 하나님께 기대해야 할 것을 사람에게 기대하며 그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채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엎질러진 기대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잔인하고 악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허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어리석게 그 사람이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 심층에 깊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실수할 수 있는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2장 24절과 25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행하시는 표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사람을 사람으로만 여겨야지 믿음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챔버스에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믿지 말라는 말로 바꾼다면 이런 말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우리가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야 될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들을 품으실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으셨으니 사람을 의심할 이유나 악감정으로 대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신뢰하면 절망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은혜와 사랑을 확신하십시오. 그러나 사람을 확신하지는 마십시오.
혹시 사람에게 실망해 마음이 아픈 분들이 있나요? 그렇다면 오늘 아주 오래된 이 찬양을 흥얼거리며 허상을 제거하는 훈련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아는 분들 같이 따라 해 볼까요?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난 만족하겠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동남풍아 울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알렐루야 아멘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알렐루야 아멘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은 사람을 신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이 가장 믿는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 봅시다. 그 사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허상을 제거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이 아파하고 힘들고 상처받고 그 모든 이유들이 사람을 믿는 것 때문에 비롯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말아라' 사람은 우리가 믿어야 될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고 품어야 될 대상이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을 믿을 때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헛된, 믿지 말아야 될 것, 믿지 못할 것, 하나님 앞에 내어놓게 하여 주옵시고 하나님 한 분 붙들고 우리 주변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더욱더 사랑하며 이 믿음의 길을 가며 잘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구름 속에서 무엇을 봅니까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요한계시록 1장 7절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듯한 우리 개인 생활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슬픔, 고통, 궁핍의 상황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구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으로 걸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십니다. 만일 구름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도 없을 것입니다. "구름은 단지 우리 하늘아버지의 발에 티끌이로다"(나 1:3). 구름은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증표입니다. 슬픔과 사별과 고통이 하나님과 함께 오는 구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귀한 계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구름 없이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청명하게 비치는 가운데 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구름을 통해 우리가 배웠던 것을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구름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확하게 어린아이처럼 될 때까지 우리 믿음을 단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중심은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요,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림자가 될 때까지는 구름과 어둠은 언제나 나에게 임할 것이며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과연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인생의 신비들을 해석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어둡고 암담한 현실을 직접 대하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는, 아직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눅 9:34). 당신의 구름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입니까? 그렇다면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9일 구름 속에서 무엇을 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구름이 뜻하는 것

구름과 어둠은 챔버스의 묵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굉장히 익숙한 말이 될 것 같습니다. 챔버스는 자신이 4년간의 구름과 어둠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1장 7절 말씀 볼지어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말씀을 통해 구름은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듯한 우리 개인 생활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슬픔, 고통, 궁핍의 상황들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구름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길을 배웁니다. 이렇게 힘들고 아픈 구름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만일 슬픔과 사별, 고통이 하나님과 함께 오는 구름이라면 그 구름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챔버스는 완전히 새로운 신앙적 관점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없이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청명하게 비치는 가운데 오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이런 구름을 보내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고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구름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서 알고 있었던 지식들을 버리기 원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름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름을 통해 단순하고 명확하게 다가오십니다. 구름을 통해 우리는 구름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챔버스는 이 구름의 시간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그림자가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선명해질 때까지 구름은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면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 사별과 같은 아픔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구름이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을 때가 오면 그 구름은 더 이상 우리의 인생에 구름이 아니겠죠. 우리가 오늘 물어야 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순례자의 노래]에 나오는 글입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네, 저는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피로를 채워질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돈도 없고 미래도 없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의 연단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뒤로 물러나 뭔가 다른 것을 의지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은 시련을 이긴 믿음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시련을 통과하여 이기면 하늘 창고에는 많은 것들이 축적된다. 그래서 다시 시련이 와도 그 자원을 사용함으로써 쉽게 이길 수 있다.
굉장히 좋은 글인 것 같아요.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고통은 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선명하고 단순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됨

조금 전에 구름이 구름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관점을 가졌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는 구름이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더 이상 구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챔버스의 말.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인생의 신비들을 해석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면 지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비에 가려진 우리 인생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인생의 구름을 통해 그 구름을 제거하는 방법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구름이 더 이상 구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식으로 구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변화산 체험을 비유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4절 이 말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의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제자들은 왜 무서워했을까요? 구름 속에서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하늘에서 음성을 듣고 주님을 바라볼 때 그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구름 속에서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구름 속에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오늘은 중세 영성가 중의 한 사람인 메이틸드의 일화로 묵상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아마 오늘 묵상 전체를 잘 이해토록 설명해 주는 그런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메이틸드가 하루는 자기가 오랫동안 겪고 있는 육신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그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왼손에는 고통이라는 붉은 포도주를, 오른손에는 하늘의 위로라는 흰 포도주를 들고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장 고결한 사람은 붉은색과 흰색의 포도주를 모두 마시는 사람이다." 이 환상은 메이틸드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삶의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동일한 무게의 축복이라는 응답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고난 속에서 교만과 욕심과 집착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고난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순간 '구름'은 신비가 아닌 지식이 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하나하나 열거해 보세요.
이것이 주는 신비로운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늘 구름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구름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고난과 아픔, 사별, 이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구름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이 구름 가운데서 주님을 바라볼 때 구름이 우리의 인생에 더 이상 구름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됨을 믿습니다. 하나님, 고난으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난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의미 있게 만드는지를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우리의 신비로운 것들이 아하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렇게 깨닫게 되었구나 우리의 지식으로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 인생의 구름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그 주님으로 인하여 더 이상 그 구름이 구름이 아닐 것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하여 주옵시고, 오늘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주님의 목적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마가복음 6장 4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강권하실 때 그분께 순종하면 그분이 우리를 대성공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성공의 꿈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내세우면 안 됩니다. 주님의 목적은 오히려 반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어떤 특별한 목적을 향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나의 꿈입니까? 그분의 목적은 지금 내가 주님과 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요동 속에서 평안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마무리를 향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그 과정입니다. 해변도 보이지 않고 성공도, 목적지도 없는 가운데서 파도 위를 걷고 계시는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바다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보기 때문에 완전한 확신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과정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지금 받아야 하는 것이지. 나중에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분의 목적은 이 순간을 위한 것이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한 이후의 일들에 관해서는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순종한 이후의 일들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면 그릇되게 됩니다. 사람들이 훈련 또는 준비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주께서 지금 내 삶의 혼돈 위에서 걸으실 수 있음을 내가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 외에 더 이상의 목적을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당면한 현재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다가오는 각 순간들마다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일 오늘은 7월 28일 주님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래 우리들이 쭉 함께 보았던 묵상글 중에 저 개인적으로는 오늘 말씀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동안 무감각하게 그냥 따라왔던 분들에게는 조금 자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에게 참 좋았던 이 말씀이 여러분들 누군가에게도 또 그런 좋은 말씀이 되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과정 vs 목적

어제 묵상에서 순종을 통해 영적 지식을 얻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묵상의 원 제목은 After obedience -what?이라고 되어 있어요. 순종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혹은 순종 위에 무엇을? 원 제목을 보니 오늘 묵상이 더 명확하게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영적 지식을 얻기 위해 순종했는데 그 순종의 다른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오늘 묵상은 신앙생활에 꼭 기억해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챔버스가 정리한 한 문장입니다.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다시 한번 요 말씀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문장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께 왜 순종하나요? 사실 그 순종을 통해 이루고 싶은 성공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성공의 꿈을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적이 우리의 꿈과 반대인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순종의 과정을 통해 특별한 목적에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순종을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순종이라는 목적에 다다르면 그 순종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룰지에 대해서는 자유하게 됩니다.
순종이 목적이 될 때 그다음 결과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니 말입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그분의 목적은 지금 내가 주님과 주위에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요동 속에서 편안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입니다.
그분의 목적이 바로 그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6장 45절 이하에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묵상 본문이죠.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한밤중에 제자들이 풍랑이는 바다 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서워 떨 때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셨고 제자들은 주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6장 50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셨을까요? 풍랑이는 바다 위에서는 해변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무엇이 성공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고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 순간에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만 필요합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확신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어떤 거대한 목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종의 습관과 과정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는 원대한 목적을 바라는 게 아니라 지금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신앙적 관점을 배웁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 훈련받아야 하는 시간들을 지나갑니다. 그럴 때면 이 훈련의 시간을 지난 뒤 미래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가 말합니다.
그분의 목적은 이 순간을 위한 것이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한 이후의 일들에 관해서는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순종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순종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한다면, 올바른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을 어떤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면, 힘든 훈련의 시간을 견디면 무언가 있겠지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순종에 대한 보상을 바라며 훈련받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순종에 있음을 알 때 그 순종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미래를 위해 순종을 참아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의 순종이 복됨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사람들이 훈련 또는 준비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적이라고 부르십니다. 참 놀라운 것은 지금의 순종이 목적임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종의 순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하나하나 이루어 감을 알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멋지게 느껴지겠습니까? 우린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위해 참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을 순종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주일설교에 인용했던 불의 전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떤 뉴스 기사에 잘 정리되어 있어서 제가 조금 읽어 드려도 될 것 같아요.
자신을 남들보다 '빠르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믿었던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영국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에 출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종목인 100미터 경기 예선전이 주일로 확정되자 과감히 경기 불참을 선언합니다. 그에게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의 결정은 달리는 목적이 자신의 웃음과 야망이 아닌,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에릭의 불참 소식이 영국 전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를 두고,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자', '광신주의자'라며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의 왕세자까지 나서서 리델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는 "주님의 법 안에서,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갖은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리델은 기적적으로 400미터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에릭 리델은 금메달을 목적으로 달려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순종을 목적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주 종목이 아닌 400미터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됩니다. 그런데 인생의 황금기에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중국 선교사로 떠납니다. 그의 목적은 우승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대한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적은 지금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삶의 최종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이 지금 순종하는 삶과 일치합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에게는 늘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순종하면 이것을 하면 우리들이 이것을 이룰 수 있겠노라고 생각했던 적이 참 많습니다. 근데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순종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란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이 순종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면 순종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순종하신 그 순종이 다음 순종으로 이어지고 그다음 순종으로 이어지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명한 삶에 다다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과 이런 순종을 주시옵소서.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삶이 하나님 앞에 가장 복된 순종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먼 훗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렇게 인도하셨노라고 간증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진리를 아는 방법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장 17절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황금률은 지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사람이 과학적인 지식을 원하면 지적 호기심이 그를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닫고자 한다면 오직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일들이 내게 힘들어진다면 이는 분명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러합니다. 지적 어둠은 무지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영적 어둠은 내 안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으로 인해 당장 시험에 놓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불순종하면서 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가 하고 의아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재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며, 우리는 단 한순간도 주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미세한 부분까지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자신을 변명하려는 사람을 들추어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말씀으로 마음속에 임하게 할 때 회피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회피하면 당신은 종교적인 위선자가 됩니다. 당신이 변명하며 순종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조심하십시오. 당신이 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십시오. 광신이라고 생각될 위엄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7일 진리를 아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눠 보겠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오늘 묵상에서는 영적 지식을 얻는 것과 과학적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배우게 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과학적 지식은 호기심을 통해 얻는 지식이고 영적 지식은 오로지 순종을 통해서만 얻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황금률은 지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일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면, 순종하지 않으려는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지적 어둠이 무지에서 비롯된다면 영적 어둠은 우리 안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주의 말씀으로 마음속에 임하게 할 때 회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올 때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말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는 것은 이미 그 말씀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본 회퍼와 함께하는 하루]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 119편 9절의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요.
"•••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하나님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시라는 외침은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계명을 알게 하셨기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척 변명할 수 없음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처한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불순종의 결과로 계명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계명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며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 지식은 순종과 분명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곧바로 우리를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에서 네 형제에게 원망드릴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왜 시험이 될까요?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재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며, 우리는 단 한순간도 주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에 비치기 때문입니다. 변명하고 감추는 것, 순종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들춰내십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 우리의 양심이 아주 민감해집니다. 영적 지식이 성장할수록 민감해집니다. 아주 작은 죄에도 마음이 아픈 것은 말씀의 칼이 우리의 심령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를 아프게 할 때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혹시 성장통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키가 한창 자랄 나이에 아이들이 겪는 아픔입니다. 왜 이런 통증이 찾아올까요? 아직까지 성장통이 생기는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다만 몇 가지 추정하는 원인이 있을 뿐인데 첫 번째는 아이들의 뼈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무릎 근처에 힘줄이나 근육이 뼈의 성장 속도에 못 미쳐 근육과 힘줄을 당겨 일시적으로 통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이 하루 종일 뛰면서 노는데 이로 인한 과도한 운동으로 성장통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성장통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고통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말씀으로 마음속에 임하게 할 때 회피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회피하면 당신은 종교적인 위선자가 됩니다.
원문에서의 위선자라고 하는 영어 단어 humbug라고 하는 단어는 사기꾼을 뜻합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분명히 들어왔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위선자요 사기꾼입니다.
말씀을 아는 대로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가면을 쓴 위선자가 되고, 그 위선으로 남을 속일 수 있으니 사기꾼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상태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영적으로 기괴한 괴물로 변해 가지 않겠습니까?
오늘 묵상의 마지막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순종하십시오. 광신이라고 생각될 위엄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 뜻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은 광신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을 몰아붙이는 맹신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산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광신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고 있다는 증거요 좁은 길을 따라 영생으로 가고 있다는 명확한 표식이 될 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알게 되는 것에 대해 주님은 나의 최고봉 스터디 가이드에서 잘 정리를 해 놓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간 우리는 즉시 시험을 받게 됩니다. 이를테면 말씀에 대한 순종 테스트입니다. 둘째로 자기변호는 하나님이 특별히 싫어하는 죄입니다. 셋째,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위선자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 성도를 광신자로 평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앞에서 핑계를 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말씀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까?
그 아픔에 대해 깊이 묵상해 봅시다.
그것이 성장통임을 알게 될 때 감사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누구나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지만 그 성장에 합당한 고통을 감내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부딪쳐서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파하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고민할 때 그 아픔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오늘 하루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힘들어할 때 기뻐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이 성장하고 있구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구나 우리들의 삶에 이런 간증이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여 주옵시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믿음으로 영적으로 더 성장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청결한 삶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마태복음 15장 19절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신뢰하면서 이를 '순진'이라고 부르고, 순진을 신뢰하면서 이를 '청결'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혹독한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움츠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끔찍한 것들 중 하나라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시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최고의 권위자이신지 아니면 그분의 말씀에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인물이든지, 둘 중 하나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꿰뚫는 말씀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순진한 무지를 더 신뢰하겠습니까?
만일 내가 자신이 순진하다는 의식을 시험대에 올려놓는다면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떨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악과 허물의 가능성을 보며 놀라게 됩니다. 내가 순진이라는 피난처 아래에 머무는 동안 나는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체험해보지 못했다면 이는 겁 많은 소심함과 문명생활의 보호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서게 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들을 향한 진단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는 유일한 안전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만일 나 자신을 주님께 맡기면 마음속에 있는 끔찍한 죄악의 가능성을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결은 인간적으로 이루기에는 너무나 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그분은 개인의 삶의 중심부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셨던 그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곧 성령만이 더러움이 전혀 없으신 완전한 청결이십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6일 청결한 삶 이란 주제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청결함으로 사는 방법

오늘 묵상에서는 우리가 순진한 무지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무서운 죄를 숨기며 핑계 대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챔버스는 이것을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 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이 조금 쉽지 않습니다. 제가 쭉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무지를 '순진'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순진을 '청결'로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주 냉혹한 주님의 말씀 앞에 설 때 우리 마음의 정체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려 하실 때 우리가 반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오면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서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조금 더 신경 쓰지 않든지 말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의 꿰뚫는 말씀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순진한 무지를 더 신뢰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변명거리가 점점 늘어납니다.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점점 회피하죠. 손성찬 목사가 쓴 [일상의 유혹]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좋은 말, 위로의 말만 하지 않는다. 부정하고, 실패하고, 넘어지는 것도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싫은 소리를 해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에, 성경에 뻔히 존재하는 책망과 돌이킴의 메시지들을 회피한다. 그래서 성경의 '선지서'는 우리들에게 언제나 낯설다 거의 3분의 1 정도의 성경을 드러내어 던져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들으려 한다.
진정한 청결을 위해 해야 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순진한 무지를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신뢰하는 순진함과 무지의 정체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때 내 마음에 얼마나 무서운 악과 허물이 있는지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표현하죠. 내가 순진이라는 피난처 아래에 머무는 동안 나는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표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순진이라는 이름 아래서 아주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자신의 악함은 경험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자의 낙원은 거짓된 것입니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챔버스는 또 우리가 소심함과 문명 생활의 보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도 좀 이해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소심함'이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속상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비겁함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계속해서 '나는 순진하고 무지해서 그래'라고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아무리 핑계를 댄다고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진실은 드러날 것입니다. 문명생활의 보호로 인해 어리석은 낙원에 살았다는 것은 현실 생활에 편안함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다는 그런 의미일 것 같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 중에 하나가 삶에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으면 도대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돌아보려고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C.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었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의식하지 못한 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의 길은 문제가 있는 길이기보다는 편안한 길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험대 위에 서야만 합니다.
챔버스는 또 이렇게 말하죠.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서게 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들을 향한 진단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청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 앞에 설 때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자연적 본성으로는 이 끔찍한 죄 가능성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속은 나의 모든 삶을 주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격과 성향이 내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 양도할 때 성령님께서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거룩한 영을 삶의 중심으로 이끌어 오십니다. 우리의 삶은 성령님의 역사로만 청결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의 책 [산상수훈]에서 청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결은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상태를 '청결'이라고 한다면, 최선의 강의가 될 것이다. 청결은 단순한 천진함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들의 특징인 천진함을 청결함이라고 이해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어린아이는 청결한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의 천진함은 소중한 것이지만, 장성한 어른들은 천진하기보다 유혹을 받더라도 시험을 이겨 청결해야 한다.
사람은 처음부터 청결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청결은 갈등을 거친 결과이다. 따라서 청결한 사람은 한 번도 유혹과 시험을 받지 않은 자가 아니라, 악이 무엇인지 아는 자요, 악에게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았지만 악에게 지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 악을 극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구속에 의해 우리 안에 청결한 마음을 넣어주셔서 하나님께서 아무 흠도 잡을 수 없게 만드신다. 이것이 구속의 기적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새로운 유전형질, 곧 성령의 더럽혀지지 않은 형질을 주셔서 이 형질이 현실 속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순진한 무지'라는 피난처 아래 자신을 숨겨 날카로운 말씀의 칼을 피하려 해선 안 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 앞에서 당신을 찌르는 말씀의 칼을 당당하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청결하고 거룩한 삶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적나라하게 서는 것도 쉽지 않고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께 요청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성품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통해서 주님의 성품이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가장 무서운 것, 우리들이 순진한 척 우리들의 무지를 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 청결함이 이 세상에 악과 싸워 이기며 이 세상에 악과 싸움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임을 우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사, 싸움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가지고 당당하게 맞서 이 세상의 불의함과 싸워내는 사람들, 그렇게 청결함을 드러내는 우리 귀한 그리스도인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성령의 폭발적 능력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 10절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 너무나 간단하고 평범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은 고상한 사람들에게나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운 금언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거친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실용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성령의 폭발적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터질 만한 상황이 되면 산상수훈의 교훈들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합니다. 성령께서 이 산상수훈의 교훈 중 하나를 기억나게 하시면 우리는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환경에서 발생하게 될 놀라운 영적 변혁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산상수훈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굳이 우리가 거듭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입니다.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주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엄중한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놀라울 정도로 불편합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교훈들을 우리 상황에 적용하실 때 우리도 서서히 예수님의 교훈에 합당한 마음과 언행을 형성해 가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규범이나 율례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진술한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5일 성령의 폭발적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으로 인해 아프다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팔복 말씀을 감상만 하지 말고 삶에 적용해야 성령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법칙이 아닌 현상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합니다. 그저 좋은 말씀으로만 여기는 상태에서 굳이 거듭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챔버스는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규범이나 윤례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진술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게 하시니 우리는 삶에서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엄중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팔복 말씀은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적용될 때 나타나는 현상인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관념에 머무르게 두지 않고 실제 삶에 적용하려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의 가르침이 세상의 논리나 방법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적용되기 시작할 때 불편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때 말씀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산상수훈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말씀이 역사할 때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다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를 찾아와 등록했던 한 부부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목사님 교회 근처로 이사 오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든지 그 말씀으로 인해 제 마음이 불편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 마음에 꼭 맞는 말씀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 젊은 부부의 말이 저에겐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그 말씀으로 인해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정욕으로 가득한 내 삶이 당연히 아프고 쓰리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복을 추구하며 살던 우리에게 영적인 복을 말씀하시는 산상수훈이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통곡하게 하고 많이 아프게 한다면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말씀으로 인해 아프다면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팔복 말씀을 하나하나 열거해 봅시다.
어떤 말씀이 가장 아프게 다가옵니까?
그 아픈 말씀으로 인해 기뻐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규칙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될 때 그것은 능력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삶에 능력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다가오실 때 그 말씀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끄럽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릴 아프게 할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작동되고 있음을 우리들이 믿기에 하나님 앞에 그 아픔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해 주세요.'
그 말씀이 우리들의 삶에서 적용할 때 폭발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을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살아내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성향과 행동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장 20절


주님의 제자의 특징은 어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라면 선한 동기를 가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해 선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능가하는 유일한 것은 선한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게 삶의 주권을 맡기는 자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새로운 유전형질을 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그분의 제자라면 삶이 의로워야 할 뿐 아니라 마음의 동기나 소망, 마음속 깊은 곳에 생각들도 의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속 동기까지 순결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적하실만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영원한 빛 앞에 설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적하실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실 수 있고, 그를 갓난아기 같이 순결하고 단순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결은 만일 내가 주 안에서 재창조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구속을 통해 착수하신 일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을 순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례와 규칙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진리인데 오직 그분이 우리 안에 넣으신 새로운 성향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분이 우리의 유전 형질을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인성이 아니라 그 근원을 바꾸십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4일 성향과 행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기독교 역사에서 끊이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성향과 행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챔버스의 독특한 방법이죠. 이렇게 단어나 콘셉트를 비교하는 겁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의로운 행동이 나타나는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죠. 챔버스는 오늘 묵상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의 특징은 어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라면 선한 동기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해 선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챔버스의 이 말은 믿음과 행위가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챔버스가 선한 일(right doing)이라고 말하는 것과 선한 존재(right being)이라고 하는 것으로 둘을 구별하고 있는데, 이 둘이 별개가 될 수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선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한 존재가 되면 자연스럽게 선한 일을 합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은혜로 선한 일을 하도록 변화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의 기간 바리새인들에 의해 대하여 많은 질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책이 의로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의로운 존재가 되지 않고서 의로움을 행하려고 하다가 위선적으로 변한 것이죠. 오늘 본문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의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글을 통해 본문의 이해를 조금 돕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옳은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의'를 행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훨씬 뛰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의로운 존재가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의 의로운 행위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 의로운 존재가 되지 않으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우리의 의가 행위에 있어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알다시피 전혀 의로운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그들의 의로운 행위를 능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다.

기억하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선하지 못한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것이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게 삶의 주권을 맡기는 자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새로운 유전 형질을 넣어주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선한 행동으로 선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우리를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선한 존재가 되어야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로운 성향으로만

이제 존재와 행동이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삶도 의로워짐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순결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지적할 만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앞에 섰을 때 여전히 의와 순결을 자신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삶을 살았던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구속의 사건을 통해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향을 넣어주실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성품과 성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죠. 바로 이 구속의 사건에서 인간의 재창조가 시작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가장 놀라운 것은 그분이 우리의 유전 형질을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인성이 아니라 그 근원을 바꾸십니다.
유전형질을 바꾸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본 회퍼의 책이죠. [본 회퍼와 함께하는 하루]라는 책에 보면 3가지 차원의 변화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읽어 드리겠습니다.
성육신 하신 분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의 모습과 다른, 더 낫고 더 이상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모든 겉치레, 위선, 긴장과 강박관념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현실의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도 현실의 인간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고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서 매일 죽어야 하는 표를 몸에 지닌 존재입니다. 심판과 은혜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그는 자신의 삶으로 증명합니다.
부활하신 분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인간은 죽음 한가운데서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그는 죄의 한복판에서도 의롭습니다. 그는 옛사람의 모습이지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의 비밀은 세상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기 때문이며, 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
주님의 제자들에게 행함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자신을 순결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율례와 규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새로운 성향이 생깁니다. 이 새로운 성향으로 인해 참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고 올바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행동을 고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우리 본성의 유전 형질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올바르게 행하고 싶다면 먼저 새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내 안에서 옛사람과 다른 전혀 새로운 유전 형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사람을 꿈꿔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바람은 있지만 바람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갈등과 번민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마음속에 소원이 있는데, 내가 바르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좌절할 때도 있고 또 그것이 부끄러워서 때로는 위선적인 삶을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올바른 행동 올바른 삶을 살려고 하는 의지보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존재 하나님의 자녀 거듭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에게 먼저 그런 기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주옵소서 내 아내 성품을 우리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 안에서 이 변화된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하나님 앞에 복된 자녀로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