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의 신비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장 30절


거룩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내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룩은 점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거룩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는 순간에 즉시 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예수님의 거룩이 나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 경이로운 비밀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룩(성화)은 곧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며, '예수님의 놀라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인 선물인데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났듯이, 성화가 당신의 삶을 통해 실제로 드러나도록 당신이 허락하겠습니까?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내, 사랑, 거룩, 믿음, 순결, 경건 등의 모든 품성들이 정결하게 된 영혼의 내면 안에 부여되어 그 영혼을 통해 외부로 드러납니다. 거룩이란 주님께로부터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나타났던 거룩을 주님께로부터 받아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은 부여받는 것이지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방은 거룩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합니다. 거룩의 신비는 예수님의 모든 완전 하심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디지만 확실하게 "예수님의 지키시는 능력에 의해" 질서 있고 건전하고 거룩한 신령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3일 거룩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거룩 : 그리스도계 품성을 부여받는 신비

어제와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이 동일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거룩(Sanctificati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번역본에서는 어제 묵상을 거룩의 조건, 오늘 묵상을 거룩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거룩을 이루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거룩의 조건은 모든 것이 죽고 나만 남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채워주시는지 그것은 신비의 영역임을 다루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거룩이 이루어지는 것은 신비로운 이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함이 우리에게 부여된다니 또한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 안에서 거룩이 시작된다니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요?
우리가 말하는 성화는 주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화는 주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품이 우리 속에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믿을 때 그 성품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고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거룩함이 단순히 주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오스왈드 챔버스의 거룩과 성화]에 보면 조금 더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립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거룩한 능력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의식하지 않아도 거룩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거룩함의 비밀이다. (중략)
바울은 거룩함에 대해 말할 때마다 '모방'이 아니라 '수여'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방의 본으로 계신 것이 아니다. 거룩함은 결코 모방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 즉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모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하다. 거룩함의 비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수여'받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거룩함의 비밀에 입문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완전함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부패한 우리의 육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명이 드러나는 것은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선물은 믿음을 통해 우리가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의 신비가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났듯이, 성화가 당신의 삶을 통해 실제로 드러나도록 당신이 허락하겠습니까?
이전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라고 수차례 걸쳐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구원의 은혜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의지가 필요한 거죠. 챔버스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이죠. 이 부분을 주목해서 한번 들어보세요.
거룩이란 주님께로부터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나타났던 거룩을 주님께로부터 받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에서 이 수여라고 하는 impartation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지 어떤 능력으로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존 오웬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책에서 죄로 인해 소멸될 수 있는 피조물의 거룩과 유일하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거룩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한번 주의 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이시다. 피조물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다르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도 거룩함이 있었지만 죄로 인해 소멸되었다. 그것은 타락한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거룩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부여받은 거룩함(imparted holiness)이다.
우리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챔버스는 어떤 의지는 버려야 하고 어떤 의지는 붙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자연적 성품에서 나오는 의지로는 거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선한 의지를 잘 사용해야 되는 것이죠.
거룩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그 거룩이 우리의 성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은 부여받는 것이지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방은 거룩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 있습니다. ••• 거룩의 신비는 예수님의 모든 완전하심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의 신비가 내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비를 고백하는 믿음에서부터 거룩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점진적이지만 확실하게 주님의 능력으로 이러한 신령한 삶을 살아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거룩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부여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가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거룩한 삶의 비밀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완전하심이 부패한 우리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나의 삶에서 나타나는 부패한 성품과 주님의 거룩한 성품 무엇입니까?
이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소원이 있었습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가진 능력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거룩함으로 나아가다 많은 실패를 경험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위해 이런저런 능력을 달라고 기도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능력으로도 우리가 거룩해질 수 없음에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노력과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이 내 안에 자리 잡을 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실 때 그분의 성품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거룩함이구나.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와 동행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성품이 나를 통해 나타나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그런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거룩의 조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


우리의 거룩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살려야 하는 쪽도 다루시지만 죽어야 하는 쪽도 다루십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시체 더미만 있는 죽음의 편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거룩을 이루는 과정에는 언제나 고귀한 싸움이 있는데, 이 싸움은 내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에 항상 대항하는 어떤 세력과 싸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거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시면 바로 싸움이 시작됩니다."무릇 내게 오는 자가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거룩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은 '나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죽음의 장소까지 우리를 몰고 가십니다. 기꺼이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자기 유익도 구할 수 없는, 단지 죽음만 기다리는 '나 자신'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거룩의 조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가 •••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거룩의 이 지점이 바로 싸움이 시작되는 곳이요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하는 곳입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하나 되기를 거절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원하실 수 없어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나'가 되어도 괜찮겠습니까? 단호한 결심을 통해 나의 모든 친구들이 아는 나 자신을 벗어버리고 나 자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접고 단지 완전히 비워진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 '나'만 남는 그 순간에 주께서는 나를 전적으로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은 간절함 외에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주여, 제게 거룩함이 무엇인지 보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보여 주실 것입니다. 거룩이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무언가 추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이 바로 나의 거룩인 것입니다(고전 1:30).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2일 거룩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싸움에서 시작되는 거룩

오늘부터 이틀 동안 우리는 거룩이라는 주제를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은 거룩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상태로 몰고 가시는지에 대해서 내일은 어떻게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채워주시는지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오래전 묵상했던 2월 8일 묵상에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거룩'을 잠깐 살펴보는 것도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살려야 하는 것이 있고 죽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내면에 무언가를 요구하실 때 시작됩니다. 챔버스가 말합니다. 성령께서 거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시면 바로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 싸움은 치열한 과정을 지납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과정에는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없으며 자기 유익도 구할 수 없는 죽음의 장소에 오직 나 자신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 거룩의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거룩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은 비로소 거룩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이 바로 이 싸움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이 싸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에 실패합니다. 이 싸움은 우리에게 기꺼이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기를 거절하며 거룩에 실패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치열한 싸움 앞에서 결단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A.W. 토저 목사님이 쓴 [믿음의 타협은 없다]라는 책에 알버트 심슨이라는 목사님의 시 <네 마음을 정하라>가 나와 있는데, 한번 이 시를 들으면서 조용히 묵상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 계시니 모두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해 혼자이시다. 잘 들어보라! 저 갑작스러운 부름이 무엇일까? 네 마음을 정하라.
예수께서 조용히 재판을 받으시니 당신은 거짓 편에 서려는가?
아니면 해를 각오하고 진실 편에 서려는가?
빌라도처럼 그분을 피하려는가 고난을 각오하고 그분을 택하겠는가?
그분을 피하려고 해 봤자 헛수건이 내 마음을 정하라.
베드로처럼 내 주님을 부인하려는가?
아니면 그분의 원수들과 담대히 맞서겠는가?
그분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겠는가? 네 마음을 정하라.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려라. "예수님 오늘 제 마음을 드립니다. 예수님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주님께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내 마음을 정하라. 중간지대는 없도다. 언젠가 너는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하실까?"라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묻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거룩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 얻어내는 것입니다.

'나'만 남을 때

어제 말씀해서 절망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현관이었다면 오늘 묵상에서는 그저 죽음만 기다리는 나 자신이 되는 것이 거룩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나만 남겨진 상태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온갖 요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나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사는 이유는 주변에 얽힌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고려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삶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요소들을 떼어내 단순해지는 것이구나. 아니, 단순하지 못하도록 붙어 있는 집착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구나' 세상에 믿을 것이 너무 많으면 오롯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기가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려할 것이 많으면 하나님 역시 그 고려 대상 중에 하나에 불과할 테니 말입니다.
나만 남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이 순간이 오면 우린 하나님과의 관계 이외에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모세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 이러한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선 곳이 거룩한 곳이 되고 거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순간 말입니다. 바울 선교회 국제본부장인 김태현 선교사가 쓴 [비움과 채움, 하나님의 다루심]이라는 칼럼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모세를 훈련한 하나님의 훈련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세상의 모든 훈련은 더하기 훈련이다. 즉 자기실현(Self-fulfillment)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더 하면 그만큼 나의 소유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다루신 하나님의 훈련은 철저히 빼기 훈련이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인간적인 것을 철저히 비워버리고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채우는 과정이다. 그의 왕자로서의 신분을 빼야 했고, 젊음과 자신의 정의감을 빼야 했다. 광야서편 끝에서 모세가 대면한 하나님의 현존 앞은 그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는 벌거벗은 실존의 자리였다.
여기는 내 것이라고 할 어떤 소유도 남지 않았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했다. 광야 서편에서 그의 출구 없음(NO EXIT)과 마주쳐야 했다. 좌우상하가 꽉 막힌 상태라고 보면 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는 거룩한 훈련 과정은 나 자신 외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밖에 남지 않도록 빼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이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뭔가 추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이 바로 나의 거룩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나'만 홀로 남겨져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어 오롯이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거룩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하나님 외에 당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루를 지나며 하나하나 떼어내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은 우리들에게 거룩이 낭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은 치열한 싸움입니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으로 인도하실 때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덜어내시고 우리 안에 모든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떼어 내시는 그런 과정을 지나가게 하심을 우리들이 기억합니다.
오늘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 우리가 놓지 못하는 것들, 우리를 거룩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 홀로 거룩의 문에 들어가는 거룩 앞에 서는 귀한 우리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


주님을 선생으로 먼저 생각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생에 불과하다면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기준을 세워놓고 약을 올리는 것입니다. 내가 도무지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르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입니다. 내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마음의 청결, 내 의무보다 더하는 것. 하나님께 완벽하게 헌신하는 것 등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산상수훈은 나로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이상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기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내가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될 수 있도록 나를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주관했던 그 심성을 주께서 누구에게든지 넣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삶의 표준은 그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로 주어진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좌절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입니다. 우리가 자기 의에 속아서 주님의 가르침을 수행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난관을 만나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까지 계속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면 계속 난관을 만나게 되어 자신의 영적 빈곤을 깨닫게 되면서 죽게 나아가 손을 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첫째 원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가난이지 풍요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나의 결정에 의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때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이 바로 왕국의 입구입니다. 아쉽게도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기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자신의 가난함에 대한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영적 전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1일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주님은 선생이 아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다 보면 여기저기 산상수훈 말씀이 참 많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이해하기 위해 들어가는 현관과도 같은 그런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불특정 다수가 아닌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야만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성령께서 마음을 깨뜨리실 때, 우리는 가난한 심령이 됩니다. 가난한 심령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합니다.
오늘 묵상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으로 아는 것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주님을 선생으로 먼저 생각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생에 불과하다면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다다를 수 없는 기준을 세워놓고 약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산상수훈을 묵상하며 우리가 절망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기준이 자연적 성품을 가진 우리들에게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선생으로 고백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행할 수 없는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에게 절망감만 심어주지 않을까요?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기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내게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될 수 있도록 나를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온 삶을 다스린 품성을 우리에게도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기준은 바로 이런 품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 변할 것 같지 않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예수님을 선생이 아닌 '주님'으로 고백할 때, 산상 수훈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닌 삶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좌절에서 시작한다

묵상을 통해 명확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좌절이지만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좌절이 거듭남의 시작이 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말씀을 살아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좌절만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더 큰 난관을 만나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이러한 상태를 내버려 두십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영적 빈곤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자는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영적 빈곤상태가 되면 주님을 향해 도움을 요청합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첫째 원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가난이지 풍요가 아닙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나의 끝, 예수의 시작]이라는 책에서 그러한 크리스천의 역설을 적절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읽어 드리죠.
'심령이 파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완전히 파산해서 내놓을 게 하나도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생각할수록 충격적인 말씀이다.
나의 끝에 이르러,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비로소 내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니 이 세상의 논리와는 철저히 대치된다.
쫄딱 망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세상이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굴지 않는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그의 심령은 시궁창에 처박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심령을 칭찬하신다.
세상은 늘 자신감을 내비치라고 가르친다. 요컨대 '심령이든 뭐든 부유하라!', '쓰레기더미 위가 아닌 세상의 꼭대기에 서라!'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잔고가 '0'이 될 때 시작한다. 내놓을 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때 비로소 전진하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 개념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리를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는 결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의식함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산상수훈 말씀을 주신 이유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복이 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입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해지는 것도 역시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챔버스가 말하는 것처럼 영적 생활에는 과정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한순간에 무엇을 이루려고 조바심 내지 마십시오. 요즘 당신의 삶에서 좌절을 많이 느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역사하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좌절의 문턱에서 진정으로 복 있는 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네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의 심령은 가난합니까?
완전한 영적 무기력을 경험했습니까?
그렇다면 절망할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믿고 있었는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합니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칭하며 주님의 말씀이 너무 어렵다고 절망 가운데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선생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주가 되셔서 말씀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질 때, 우리의 영이 절망감을 느낄 때, 우리들의 삶이 완전히 무기력해질 때, 주님은 우리들에게 내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들에게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혹시라도 아직 너무 교만해서 주님 앞에 나를 내려놓지 못했던 사람들 아직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의지만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가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주님 나는 이제 가난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요청하며 영광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주님 앞에서 걷는 삶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31절


걷는 데는 스릴이 없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건강하고 안정한 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는 가장 높은 차원에서 힘을 소유한 것입니다. "걷는다"는 단어는 성경에서 인격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예수께서 건의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 성경에는 추상적인 것이 절대로 없습니다. 언제나 선명한 실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되라"고 하지 않고 "내 앞에서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때 스릴을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스릴을 향한 소원은 육체적으로 성령을 흉내 내려 할 것입니다. 스릴을 향한 소원은 감정적인 영역에서는 부적절한 애정으로 나아가게 하여 도덕적으로 파멸하게 할 것입니다. 만일 영적인 영역에서도 계속 스릴을 원하여 날개 위에만 오르려고 하면 결국 믿음을 잃고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는 어떤 장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앞에 주님을 모시겠다는 결단에 따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의 임재의 실체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기를 거절한다는 점입니다. 시편 기자의 "그러므로 •••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46:2-2)라는 체험 고백은 우리가 주님의 실체에 서 있을 때 가능합니다. 실체에 서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감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를 믿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실제로 언제나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오 주님, 저를 이렇게 저렇게 인도하소서"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주님은 인도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상식적인 결정이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주님은 가책하시고 막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잠잠히 주님의 임재를 바라는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20일 주님 앞에서 걷는 삶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걷는 것

오늘 묵상을 풀어나가는 챔버스의 비유가 참 좋습니다. 걷는 데에는 스릴이 없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건강하고 안정한 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스릴은 없을지 모르지만 걷는다는 것이 건강의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 31절에서도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고차원적인 상태에서 나오는 신앙의 힘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걷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을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36절에 보면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걷는 것만큼 실제적인 것이 있을까요? 주님의 걸으심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사는 것은 주님 앞에서 걷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걷는 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을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걷는 것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가장 보통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챔버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때 스릴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스릴을 원하면 우리는 곧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감정적 기복은 도덕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만일 영적인 영역에서도 계속 스릴을 원하여 날개 위에만 오르려고 하면 결국 믿음을 잃고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챔버스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영적 상태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없는 지루한 일상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화산 체험에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데리고 내려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진정한 사역은 영적으로 신비한 체험을 한 상태가 아니라 그 상태를 벗어난 일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모세의 부르심을 통해 어떤 거룩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가 곧 거룩한 곳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셨던 그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꾸 거룩한 장소를 찾아 헤매면서 정작 하나님의 임재 앞에는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은 언제나 우리 삶의 주님을 모시겠다는 결단입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임재를 감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늘 함께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실체를 경험한다면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은퇴하신 김득중 교수님이죠. 감신대 교수를 지낸 그분이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가]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이렇게 와닿는 글이 있어서 소개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대학교 4년 동안 그리고 대학원 2년 동안 내게 라틴어를 교수해 주시던 파울로스 교수님께 배운 것 2가지를 꼽는다면, 하나는 라틴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입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같은 학과 친구와 함께 교수님 댁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잠깐 만나 뵙고 나왔지만 그때의 방문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는 한 가지도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방에 붙어있던 라틴어로 쓰인 짧은 문구였습니다.
라틴어로 "Me Vidit Deus"(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한참 신앙적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터라 그 문구는 마음의 유별나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생활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큰 부담이 될 수 있겠으나, 코람데오(Coram Deo), 죽 그 눈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삶을 진지한 자세로 만들어줄까요?
챔버스는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에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오 주님, 저를 이렇게 저렇게 인도하소서'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주님은 인도하실 것이 만일 우리의 상식적인 결정이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주님은 가책하시고 막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잠잠히 주님의 임재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이 주님 앞에 시시콜콜 모든 일을 묻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일상적인 일들은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해도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이와 같은 일상의 사소하고 상식적인 결정들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상황이 오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가책을 주시거나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멈춰서 기다리며 주의 임재를 바라봐야겠죠. 개인적으로 저는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에 저에게 그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꾸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내가 잘못된 결정을 하면 하나님께서 막으실 것이고, 올바른 결정을 하면 하나님께서 시온의 대로를 여실 테니 말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열린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챔버스가 이야기하는 주님 앞에서 걷는 삶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설 때, 인도하시는 은혜와 막으시는 은혜를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습니까?
열린 귀와 열린 마음이 있습니까?
말씀 앞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주님 앞에서 걷는 삶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걷는다는 것은 뛰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일상적인 삶을 주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 성도들의 일상 가운데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바라보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에서 때때로 막으시는 은혜,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인도하시는 은혜,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영의 눈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오늘 하루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았노라고 하나님이 우리와 이렇게 동행하셨노라고 분명한 간증을 할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자발적 순종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한복음 13장 13절


주님은 절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너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완벽하게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 같이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을 만큼 자유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분을 죽였던 것 같이 우리도 그분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자유합니다. 그래도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이 주님의 구속에 의해 내 안에 창조되는 즉시 나는 주님의 완전한 권위 아래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는 도덕적 통치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합당하오니"(계 4:1) 내 안에 있는 가치 없는 것들만이 가치 있는 분께 순복 하기를 거부합니다. 만일 내가 자신보다 거룩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통해 오는 것들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는 내 안에 가치가 없는 것들이 드러나는 순간들입니다. 하나님은 지적인 면이 아니라 거룩한 면에서 우리보다 조금 나은 자들을 사용해 우리가 주님의 통치하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교육하십니다. 그 후 우리의 전반적인 삶의 자세는 주님을 향한 순종으로 일관됩니다.
주님께서 순종을 강요하신다면 그분은 노예 감독자와 같을 것이오 참된 권위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뵙게 되면 당장 죽게 순종합니다. 우리는 쉽게 주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실 것이며 아침부터 밤까지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은혜 가운데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는 나의 순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흙탕에 빠져있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살려내야 합니다. 순종은 동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참된 순종이 가능한 것이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되면 참된 순종이란 그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그분은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아들의 순종은 구속주로서의 순종이었습니다."  아들이 되기 위해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순종하셨습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19일 자발적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자유로움 가운데서

오늘 묵상에서는 챔버스가 계속 강조하는 순종에 대해 조금 더 명확하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묵상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에 주의해 보십시오. 진정한 순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님은 절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권위라는 말은 자유를 침해한다는 말입니다. 권위적이라는 말도 오히려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권위적인 명령으로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챔버스는 완전한 자유(perfectly fre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느 정도로 완전한 자유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모욕 가운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다니 완벽한, 퍼펙트한 그런 자유라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요된 분위기가 아닌 진정한 권위는 그분의 구속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작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통치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상태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고백을 이끌어냅니다. 요한복음 13장 13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제자들의 이 고백은 강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후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안에 있는 가치 없는 것들만이 가치 있는 분께 순복 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주님의 구속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주님의 권위에 완전히 순복 하면 우리의 의지는 주님 앞에 자유롭게 순종합니다. 만일 이러한 상태에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 인생에 불필요한 것들이겠죠.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상태는 일회적 사건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권위에 완전히 순종할 때 그것을 방해하는 본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챔버스는 신앙에 있어서 교육의 과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성도의 교제는 아주 중요한 것이죠. 챔버스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적인 면이 아니라 거룩한 면에서 우리보다 조금 나은 자들을 사용해 우리가 주님의 통치하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교육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우리 삶이 주님을 향한 순종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가치 있는 순종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강요가 아닌

묵상 전반부에서 자유가 강조되었다면 후반부에서는 강요하지 않으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순종이 강요된다면 하나님께서 참된 권위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예 감독자가 강요를 통해 노예에게 순종을 이끌어 낸다면 이것이 어떻게 진정한 순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챔버스는 이러한 순종을 진흙탕에 빠져있는 순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진정한 순종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자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러므로 내가 은혜 가운데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는 나의 순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순종은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참된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순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동등함 속에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 말씀에 주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습니다. 아들이 순종한 이유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중요한 문장을 이야기합니다. 아들이 되기 위해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순종은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의 주님이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라는 책에서 자발적 순종을 기쁨의 단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 얘기를 좀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것과 같이 순종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아들로 순종하셨다. 우리의 순종 역시 하나님의 자녀에 순종이 되게 하자. 하나님을 아들의 영, 자녀의 영으로 섬기자.
그리스도는 아들의 사랑으로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우리의 순종이 사랑의 순종이 되게 하자. 그리스도께서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을 섬기신 것처럼,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기쁘고 아주 선한 것으로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순종하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순종, 즉 동등한 관계에서의 순종은 자녀의 영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 아버지께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하는 순종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그냥 그런 그림이 그려지네요. 여러분들은 순종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얼굴에 기쁜 모습이 나타나는가? '야 나는 오늘도 순종해야 되는구나.' 그 표정이 너무 억울하고 힘든 모습은 아닐까 아버지께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하는 순종.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았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하는 순종은 자발적인가요, 강요된 것인가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순종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할 때 그 순종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 순종이기에 우리들에게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깊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들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의 순종에는 기쁨이 있는가, 나의 순종에는 감사가 있는가, 나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가? 오늘 철저하게 오늘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시고 오늘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아는 이 순종이 우리들의 기쁨과 감사의 고백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신앙의 신비

주여 누구시니이까
사도행전 9장 5절


강퍅하고 고집 센 바리새인이었던 다소의 사울이 구속의 기적에 의해 순식간에 변해 겸손하고 충성된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설명을 요구하는 것들은 초자연적인 일들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순종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불순종이 반드시 죄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명령하는 자의 우월한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그에게 순종하는 것은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유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종으로 만들어 "이것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옳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순종한다면 그가 순종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영혼들이 종교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에는 오직 한 주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주인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 보았을 때 "주께 순종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내게 화가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순종해야 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으시지만 만일 순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영혼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망확인서에 서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순종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주께서는 절대로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구속에 재창조의 능력으로부터 이탈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무관심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만일 내가 빛에 나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참람한 자가 되겠습니까? 만일 내가 빛을 거부하면 내게 화가 임할 것입니다(3:19-21).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18일 신앙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올바른 순종

어제는 복음의 능력이 인간의 설득력에 있는 말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기적에 대하여 묵상할 텐데 종교적 강요에 의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챔버스는 신앙의 신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에서 '신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소위 행간을 읽어야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주님은 나의 최고봉]의 특징 중에 하나는 이 글들을 그의 아내 비리가 짧게 편집해서 묵상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때때로 우리가 조금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분들이 등장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그 하루의 묵상글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좋은 단어, 한 문장을 얻는 것도 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도 조금 쉽지 않은 그런 부분이기도 합니다.
본문 사도행전 9장에는 그 유명한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소의 사울이라 불렸던 그가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는 다메섹 도성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챔버스는 이 회심 사건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적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죠.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조절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인 구속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기적과 같은 일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챔버스는 기적이 아닌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순종과 불순종은 선택 가능한 문제라는 것이죠. 오늘 묵상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순종의 문제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래의 글을 통해 신앙생활을 할 때 경험하는 교회나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순종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불순종이 반드시 죄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명령하는 자의 우월한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그에게 순종하는 것은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하는 순종은 도덕적 가치를 따지는 일이 아닙니다. 단지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결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위에 대한 순종은 그것의 도덕적 가치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할 때 세상의 조직과 권위에 순종해야 할 근거를 따지지 않는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챔버스가 이에 대해 아주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종으로 만들어 '이것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옳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순종한다면 그가 순종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종이 되느냐, 하나님의 종이 되느냐를 고민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혹시 영화 베켓이라고 하는 것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국의 왕 헨리 2세의 친구 토머스 베켓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죠. 헨리 2세는 자신의 마음대로 술을 즐기고 여자들과 시간을 보내고 전쟁을 일으키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력을 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당시 대주교는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죠. 그래서 헨리 2세는 자신과 함께 술, 여자, 가무를 즐기는 친구 토머스 베킷을 대주교로 임명합니다. 흥미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일어나는데 음주, 가무를 즐기기 위해 대주교를 임명한 토머스가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왕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며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죠. 헨리 2세는 자신의 친구가 적당히 대주교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열심히 설득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주교라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토마스는 결국 캔터블이 대성당에서 왕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의 권위에 대하여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종교적 비극은 이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순종은 종교적 올가미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올바른 순종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종교에서 벗어나라

챔버스 묵상의 중요한 관점 중 하나는 종교와 신앙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순종을 강요하지만 신앙은 순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종교는 순종을 강요하지만 신앙은 순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종교에서 벗어나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오직 한분밖에 없습니다. 종교에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지 못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챔버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순종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주께서는 절대로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위의 구속에 재창조의 능력으로부터 이탈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의 문제로 가장 깊이 고민했던 사람이 챔버스입니다. 그에게 순종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의 전기 [오스왈드 챔버스의 순종]에 나오는 편지와 일기를 한번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챔버스의 일기 중의 하나입니다.
큰 밀물이 나를 막아서는 것 같고, 모든 음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거나 영감을 주시기에는 내가 너무 세상적인 것은 아닐까 두렵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하늘의 비전을 기다리겠다. 아무리 지혜가 많은 사람이라도 성령께서 그에게 직접 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감히 예수님을 위해 일한다고 나서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나는 가서는 안 된다.
그의 순종의 길에 기다렸던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죠. 어느 날 그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제 인생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시기에 합당할 때 제 인생길을 바꾸실 것입니다. 저는 훌륭하지도 않고 자격도 되지 않지만 주님의 열정적인 부르심이 제 영혼 속에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고 잘해야 몽상가 또는 이상주의자로 여겨지며, 상식이 부족한 어리석은 청년으로 여겨질지라도 제게 이렇게 분명한 주의 음성을 어떻게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챔버스에게도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불순종은 우리 영혼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아들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을 통해 빛으로 나아갑니다. 빛을 거부하면 화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순종해야 하는 것과 순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종교는 순종을 강요하지만 하나님은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종교에 순종할지 말지는 우리의 선택이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죄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종교적 강요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지만 이 구별을 통해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별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아니, 구별하기 힘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지 사람에게 순종해야 할지, 이것이 믿음인지 단순한 종교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애쓰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 순종하지 말아야 될 것을 이길 수 있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순종의 사람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믿음의 기적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고린도전서 2장 4절


바울은 최고의 학자요 언변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위 말씀은 바울이 겸손한 척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그의 '멋진 웅변'으로 사람들을 감명시키면 하나님의 능력이 가리워질까봐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오직 구속의 효능에 의해 발생되는 기적이지 웅변이나 호소력의 멋진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순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구속의 창조적인 능력은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 옵니다. 그 복음을 가르치는 자의 개성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 증거자의 진정한 금식은 음식이 아니라 자신을 멋지게 드러내려는 언변, 감명, 우아함 등 하나님의 복음만이 제시되는 것에서부터 주의를 빼앗는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대언자로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서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변으로 사람들을 좀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는 예수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설교자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려는 설교자는 결국 예수님을 향한 반역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창조적인 구속의 능력을 막는 것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 12:32).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17일, 믿음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설교자의 자세

챔버스의 묵상글을 읽다 보면 종종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제가 이 아침 묵상을 준비하면서 몇 번 반복해서 읽고 원문을 보며 비교하고 인터넷에서 자료들을 찾으면서 그렇게 이해해야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챔버스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굉장히 쉽고 유머러스했다고 말을 합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스터디 가이드]에 보면 실제로 어떤 성도는 챔버스를 향해서 "목사님의 유머와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설교가 제 마음밭을 쟁기질하여 그 옷에 씨를 뿌립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고 "저는 목사님의 말씀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이렇게 표현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챔버스는 뛰어난 언변과 유머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기교는 철저하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사도바울과 챔버스의 근심이 서로 일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둘 다 말씀을 전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저는 그렇게도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 복음을 전하다가 혹시라도 재능이 드러나고 복음이 가려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염려 같은 것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겸손한 척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멋진 웅변으로 사람들을 감명시킨다면 복음의 능력이 가려지지 않겠습니까? 챔버스가 늘 강조하듯이 사역자는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이 허무한 구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이 쓴 [레디컬 투게더]라는 책에 보면 재능으로 설교하는 사람의 전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아닌 재능을 자랑하는 것은 진정한 능력이 아니죠. 이 책에 나와있는 이야기입니다. 편하게 한번 들어보세요.
몇 년 전에 경험한 어느 예배 때의 일이다. 맨 앞줄에 앉아 초청 강사가 강단을 전후좌우로 누비며 설교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인근에서는 누구라면 다 알 만큼 유명한 설교자여서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오늘 밤에는 깜빡하고 성경을 안 가져왔군요."
성경도 없이, 강사는 설교를 계속했다. 어떤 말씀을 전하길 원하시는지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며칠씩 기도했노 라고 했다. 주변을 산책하고, 커피숍에 들어가고, 서재에 앉아 고민했던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워낙 재미있고, 재기 발랄하며, 열정이 넘쳐서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마무리할 때가 됐다. 강사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랬다.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하시는지 알아내려고 가진 수를 썼지만 심중에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문득 오늘 밤에는 주께서 특별히 전하실 말씀이 없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러더니 마무리 기도를 하고 강단에서 내려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교회에서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살 수 없다.
거룩한 자녀들은 항상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힘 있고, 권위가 넘치며, 명확하고, 단호하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얻으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 이미 주신 말씀을 그저 믿고 의지하는 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백성들 사이에서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완성해 가신다.

오늘 말씀은 다분히 설교자의 자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창조적 능력이 복음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믿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복음 전하는 자의 개성이나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역사입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 증거자의 진정한 금식은 음식이 아니라 자신을 멋지게 드러내려는 언변, 감명, 우아함 등, 하나님의 복음만이 제시되는 것에서부터 주위를 빼앗는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금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설교자의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또한 설교자들이 말씀을 전하기 전에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진정한 자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로 서있다는 자기의식입니다. 설교자는 오로지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그 단에 서 있습니다.
챔버스는 조금 무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려는 설교자는 결국 예수님을 향한 반역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을 드러내고 재능을 발휘하려고 하면 할수록 복음의 창조적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북뉴스]라고 하는 잡지에서 루이스 앨런의 설교자의 요리 문답을 읽고 어떤 목사님이 서평을 썼습니다. 설교자의 자세에 대하여 좋은 내용이리라 생각해서 옮겨봅니다.
설교자는 단순히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며 말에 재주가 있다고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주님을 깊이 체험하고 경험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경험 없이 사역하고 설교한다는 것은 강단을 더럽히는 것이고 교회를 장사판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구약 시대나 요즘이나 양의 문이 되신 예수를 통과하지 못하고 전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에게는 언변과 비유와 논리와 수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자질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탁월한 은사를 가져도 교회를 위해 잠시 쓰임 받다 버려지는 설교자가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설교자는 자신에게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예수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지 보아야 한다. 이게 없다면 은사만으로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은사와 관심과 특기 이전에 영광스러운 스티그마를 지녀야 할 것이고, 이것은 더 선명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말을 통해 '무엇이' 드러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입술에는 무엇이 담겨있나요?
우리에게는 끝까지 자신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나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챔버스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종종 그런 유혹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멋지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나를 통하여 어떻게 멋지게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나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그런 교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마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은 나의 기술과 나의 능력과 나의 재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통해 복음이 나타난다는 것을, 담대하게 스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담대하게 우리가 복음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쓰임 받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장 11절


예수님은 성령이 있는 자들에게 행동의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이 간단한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 뜻은 주의 제자들은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과 주를 향한 완전한 신뢰를 언제나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이 찾아와도 "나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고 계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은 노력이 아닙니다. 혼돈이 올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과거에는 어려움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찾아갔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의식이 당신 안에 너무나 강하게 만들어져서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바로 가서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있는 자들에게 행동의 규칙을 정하셨습니다. 이 규칙은 이렇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에 관해 그 어떤 것도 잊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왜 염려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어둠을 제거하지 않으시는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공의롭지 않으신 재판관처럼 느껴질지라도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어려운 일들과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없는 사건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확신 속에서 참된 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할 수 있는 평강한 마음을 얻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7월 16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진정한 규칙

챔버스는 오늘 묵상 원문이 '주님의 영을 소유한 자들에게 주신 행동강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일까요?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주관하심을 완전히 믿고 신뢰하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펼쳐지던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고 그분께 구하라는 것이죠. 챔버스의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이 찾아와도 '나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고 계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로 들어가기 전에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이제 하나님께 찾아가 구하면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진정한 규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규칙에 의하면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스왈드 챔버스의 욥기]에서 영국의 시인이자 심리학자인 프레트릭 마이어스의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보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하나님께 보여드리며 간구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제가 시를 읽습니다.
나는 갈급하고 지치고 쇠약한데
이 고통에서 벗어날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네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소식들은 내 작은 마음을 뚫고 들어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그 고통을 고하게 하네
그분의 발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전혀 부끄럽지 않고
고통의 상처 그대로 보여드릴 수 있네
나는 그분께 치료해 주시기를 간구하네
그분 앞에 고통을 쏟으면 쏟을수록 달콤한 위로를 간과하게 되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진정한 삶의 규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아는 지식에서 출발합니다.

진정한 행동

주님께서 진정한 규칙을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진정한 행동으로 이 규칙을 지켜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1월 3일에 우리가 함께 보았던 구름과 흑암이라는 주제로 묵상했던 것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어둠을 제거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바로 믿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합니다. 어느 때, 하나님이 우리와 전혀 무관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느 때, 하나님은 전혀 공의롭지 못한 재판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진정한 규칙을 따라 진정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어려운 일들과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없는 사건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 나오는 글입니다. 누군가 로렌스 형제를 보면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요.
로렌스 형제는 말하기를,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고 또 실행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께 의뢰하는 습관을 형성하려면, 우선은 부지런히 그분께 여쭈어야 하겠지만, 그다음으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분의 사랑이 내면적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지를 신중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즐거운 날들을 보낸 이후에는 수고와 고통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그는 염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고, 또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것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로렌스 형제는 삶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길러지는 습관이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깨워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했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습관을 가졌기에 언제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안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신뢰하기 시작하면 진정한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묵상글에서 이야기하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참 아름다운 통찰이자 신앙의 고백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할 수 있는 평강한 마음을 얻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에는 평강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평강은 분명한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는 기도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좋은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아주 귀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규칙을 알려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진정한 행동이 바로 평안한 기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기도는 단순하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평안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지금 당신의 기도는 평안한가요?
만약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 있다면 평안함을 먼저 구하십시오.


기도 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잃어버렸던, 아니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한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이 찾아왔던 것도 고백합니다.
진정한 규칙과 진정한 행동,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평안함을 구하는 그런 기도가 오늘 우리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 '너희가 평안하라 평안할지어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붙잡아 주리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 붙들고 주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승리하는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