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침묵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한복음 11장 6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침묵하실 만큼 당신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큰 의미가 담겨 있으며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베다니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며칠 동안 완벽하게 침묵하셨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삶 가운데 이러한 날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그처럼 신뢰합니까? 아니면 당신은 여전히 보이는 응답만 구하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응답이 없이는 영적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구하는 축복들을 지금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당장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은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에 대해 더 놀라운 깨달음을 갖게 하시려는 신호입니다. 지금까지 아무 응답을 듣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서 신음하고 있습니까?
그 완벽한 침묵 속에서, 절망이 아닌 기쁨 속에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당신을 신뢰하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는 당신이 더 큰 계시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침묵하시면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주의 위대한 목적을 향해 당신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응답이 나타날 것인가? 언제 응답이 나탈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동안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떡을 달라고 구했더니 하나님은 돌을 주셨어."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당신은 주님께서 생명의 떡을 주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지닌 놀라운 특징은 바로 전염성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당신 안에 들어오면 당신으로 하여금 완벽한 확신 가운데서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고 솔직히 고백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그분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주님은 그렇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침묵의 은혜를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기도란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다면 주님께서는 당신과 친밀한 관계의 첫 신호를 주실 것입니다. 바로 침묵입니다.


김병선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11일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침묵의 의미

하나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예화로 오늘 묵상을 풀어 가 보겠습니다. 이한규 목사가 쓴 [행복을 향기처럼]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저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저의 다급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으면서 왜 그렇게 침묵하십니까?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저녁 6시 20분경에 아내와 저는 교회 앞에서 유치원 차를 타고 오는 딸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행복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딸 은혜가 좋아하는 맛있는 어묵을 요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슈퍼마켓에 들르자고 졸라댔습니다. 웬만하면 은혜의 요청을 들어주겠지만 그 순간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은혜가 좋아하는 어묵을 준비해 놓았는데, 영양가도 없는 과자를 사주어서 입맛을 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은혜는 엄마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막 떼를 쓰며 울었습니다. 껌 사줘요! 과자 사 줘요! 엉엉엉! 은혜야! 집에 가면 맛있는 어묵이 있어 조금만 참으면 돼!
그래도 은혜는 그 잠깐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울어댔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아내는 울고 있는 은혜에게 재빨리 냄비에서 어묵꼬치 하나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은혜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양가 없는 껌과 과자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종합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잠시 침묵으로 대응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잘 적용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이야기의 일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음에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는 기록의 말씀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신의 오라비가 죽은 후 나흘 동안이나 죽음의 비통함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의 시간에 주님은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챔버스가 맹장 수술 후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의 아내 비디는 요한복음 11장 4절에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붙들고 확신에 차서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순종에 나온 이야기죠. 하지만 챔버스는 죽었고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비디는 혼돈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비디가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원하는 응답이 아니라 챔버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응답의 결과가 우리가 매일 묵상하고 있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 침묵의 시간은 우리가 원했던 기도의 응답보다 훨씬 더 유익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훨씬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경험을 우리가 이미 많은 묵상글을 통해 배웠듯이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수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응답하던 사례들을 쭉 나열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 가운데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럴드 시처가 쓴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좋은 응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바꾸고 싶어 하신다 번역가이며 작가인 유진 피터스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행하거나 취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하고 변하기 위한 도구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침묵하실 만큼 당신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큰 의미가 담겨 있으며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오늘 묵상본문은 우리 주님의 침묵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주님께 요청했지만 그 요청에 대하여 주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주님의 행동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 보이는 응답을 주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고 계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응답이 없어도 여전히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 사람에게 주님의 침묵은 기도하는 자에 대한 신뢰의 표준입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침묵하시면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주의 위대한 목적을 향해 당신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 응답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응답의 방법과 시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확신이 찾아옵니다. 침묵이 곧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는 순간 우리는 놀라운 축복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침묵, 그 자체가 은혜가 아니라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얼마나 친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침묵하실 때,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대한 목적을 향해 당신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지금 당신의 어떤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가요?
침묵 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시나요? 아니면 조바심을 내고 있나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많은 초조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죠.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일하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실 때 우리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들의 기도와 그들의 요청에 침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 주님의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간증할 수 있는 귀한 우리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하나님의 진리가 역사할 때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태복음 11장 25절


영적 관계에서는 우리가 단계적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 관계에 있든지 아니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점차적으로 깨끗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됩니다. 이것은 순종의 문제로 순종하는 즉시 관계가 완벽하게 됩니다. 한순간이라도 순종에서 벗어나면 어둠과 죽음이 당장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우리의 순종에 의해 열릴 때까지 봉해져 있습니다. 당신은 철학이나 사고를 통해 그 계시들을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즉시 섬광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노심초사한다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빠져들어갈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참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힘으로 찾는 것을 멈추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시는 것들을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즉시 다음 것이 열립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방대한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인 순종이 5분 이내에 태양빛처럼 모든 것을 선명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일들을 이해하게 되겠지!" 당신은 지금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부가 아니라 순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순종이라도 그것에 의해 하늘이 열리고 당장 하늘의 가장 깊은 심오한 진리가 당신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순종하기까지는 절대로 그분에 대한 더 깊은 진리를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10일 하나님의 진리가 역사할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영적 관계와 영적 상태 구별하기

우리가 기억해야 될 1줄 노트 순종은 깨닫고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점차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순종의 관계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순종의 깊은 의미

순종의 조금 더 깊은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챔버스의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우리의 순종에 의해 열릴 때까지 봉해져 있습니다. 당신은 철학이나 사고를 통해 그 계시들을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즉시 섬광이 들어옵니다.
이 말은 순종이 영적 상태가 아닌 영적 관계의 문제라고 지적했던 첫 번째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순종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특권은 순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 없었던 일들을 순종하는 순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종교적 깨달음이나 철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없습니다. 챔버스의 이 표현도 아주 좋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노심초사한다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빠져 들어갈 때(soaking in it)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순종은 하나님 안에 흠뻑 빠져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종의 지점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흠뻑 있는 시간이 수없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이 좋아서 제가 다시 한번 읽어드립니다. 순종은 하나님 안에 흠뻑 빠져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종의 지점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흠뻑 젖어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슬쩍 하나님을 경험하는, 소위 시챗말로 간 보기로는 순종의 지점에 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서도 고백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앎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는 순종의 순간에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로 순종을 미루게 됩니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되겠지, 그리고 이해하면 순종할 수 있겠지'라고 말입니다. 지금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순종이란 어떤 거창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이해하면 순종하겠다는 마음에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문장 챔버스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순종하기까지는, 절대로 그분에 대한 더 깊은 진리를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순종은 깨닫고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답답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순종의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당신의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 관계와 영적 상태를 구별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불신, 우리들이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순종을 미뤄 두었다면 오늘 우리의 마음에 이런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깊은 주님과의 순정 속에서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놀라운 신비를 믿음으로 고백하며 간증할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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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가운데 나타나는 속죄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장 13절


나는 나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고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죄를 송량할 수 없으며 세상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도 없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할 수 없으며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믿습니까? 주님은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는데, 계속적으로 이를 실감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의 체험이 아닙니다. 구속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위대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그 구속 위에 세워야 합니다. 만일 나의 경험의 믿음을 세우면 나의 눈은 자신의 결백에 신경을 쓰게 되면서 가장 비선경적이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격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속죄를 전제로 하지 않은 경건을 주의하십시오. 그러한 경건은 격리된 삶에나 유익할 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쓸모없는 것이요 사람에게는 피해만 끼칠 뿐입니다. 당신의 모든 체험을 주 예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십시오. 우리가 뜻을 다해 속죄를 전제로 해서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그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는 나의 삶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그리고 은연중에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매 순간 순종할 때마다 절대자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연스러운 순종이 함께 합니다. 순종은 속죄에 모든 신뢰를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순종을 통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곧바로 체험하게 됩니다.
자연스러운 삶을 거부하는 경건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속죄의 영역으로 인도하십시오. 속죄가 삶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9일 삶 가운데 나타나는 속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속죄를 중심으로

이 좋은 10월 날에 계속해서 어려운 교리적인 부분들을 다루고 있고 굉장히 무거운 죄, 속죄에 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한 번은 깊이 묵상하고 지나가야 될 내용입니다. 오늘도 챔버스의 묵상글을 통해 중요한 신학적 주제인 속죄에 대하여 배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속죄의 사건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속되는 챔버스의 이야기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 하시지 않는 일이 있다. 우리들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하게 할 수도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죄를 송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원할 능력도 없습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할 수도 없으며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할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오로지 믿어야 하는 것은 이 놀라운 속죄를 이루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계속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실감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죠.
속죄에 관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the great need is not to do things, but to believe things.) 가장 필요한 위대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낫 투 두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트 투 빌리브 싱 이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김진두 목사가 쓴 [존 웨슬리의 생애]에 보면 웨슬리가 미국으로 가는 여행 중 풍랑 가운데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모라비아 교도들에게 감동했던 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기도하고, 성경 구절을 암송했지만, 마음속의 불안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비바람이 배를 때리는 중에 배보다도 훨씬 높은 파도가 존 웨슬리의 머리를 뒤집어 씌우고 온몸을 휘감고 쓰러뜨렸다. 시꺼먼 하늘은 번갯불에 갈라지고 천둥이 바다를 때리고 큰 돛이 찢어졌습니다. 웨슬리와 동료들은 바람에 넘어져 쓸려가 버렸다.
이때 바닥에 넘어진 웨슬리의 동료 메소디스트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평화로운 찬송 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곁에서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이 저녁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모라비아 교인들은 비에 젖고 바람에 넘어지면서도 찬성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모습이었죠. 존 웨슬리는 그들을 계속 눈여겨보았습니다. 같은 시간에 영국인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이러한 영국 교인들의 모습은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는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에 비해서 너무나 달랐던 것이죠.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예배를 막 끝낸 그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네,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존 웨슬리가 다시 "당신들 중에 있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들은 "네, 우리들 중에는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들도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존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며 울고 있는 영국 교인들에게 가서 "저기 모라비아 교도들을 좀 보시오."라고 말하며 그들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영국 교인들과 모라비안 교인들의 분명한 차이점을 말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의 체험이 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회적 체험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 믿음을 새롭게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체험이 아닙니다. 매일 역사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챔버스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부분 중의 하나죠. 당신의 체험에 의지하지 말라. 변하산 체험에 의지하지 말라. 사실은 우리의 삶에서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거죠. 체험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기는 하지만 주관적 체험을 절대화하면 교만해지고, 자기중심적 죄에 빠지게 됩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구속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르신 위대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그 구속 위에 세워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믿음을 세우면 자신이 기준이 되어 결백과 거룩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는 비성경적이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속의 사건에 근거하지 않는 경건은 격리된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유익이 될지 모르지만 구속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무익한 것입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궁금하신 분은 7월 10일과 12일 묵상에서 챔버스가 과거의 수도원주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시길 바라고 한번 봐둬 좋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자신의 영성을 키우고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시도들이 자신들의 경건을 유지했을지는 모르지만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살아내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제로 하지 않는 경건에 주의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지나친 경건이나 은둔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속죄가 매일매일 경험되지 않는다면 경건과 거룩은 오로지 자기애로 변질될 뿐이며 곧 영적 교만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준이 놀라운 속죄의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체험을 예수님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이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위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경건했고 거룩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거룩이 주님의 거룩에 기초한다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용서에 따라 우리는 관용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따라 자비로울 것입니다.
챔버스는 속죄와 순종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순종은 속죄에 모든 신뢰를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순종을 통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곧바로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속죄의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의지적으로 동의할 때 순종이라는 이름의 삶이 나타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렇게 순종하는 자만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쁨은 순종한 자만이 경험하는 특권입니다. 이 놀라운 순종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속죄의 사건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만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가 이렇게 말하죠. 자연스러운 삶을 거부하는 경건을 경계하십시오.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속죄의 영역으로 인도하십시오. 속죄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참 거룩과 참 경건은 속죄의 삶을 체험하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은 오늘도 속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역사에 감동합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겸손한 하루를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무섭게 묻고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오늘도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느냐, 혹시라도 우리의 신앙이 어제의 경험 과거의 체험에 머물러 그 체험을 근거로 우리의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과거가 체험했지만 지금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사라진 것은 아닌지, 오늘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라고 권면합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내 마음으로 내 삶으로 고백하기를 원하고 저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속죄의 은혜가 되살아나게 하여 주시사 그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하루 살아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내게로 오라"는 말씀 따라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수치를 느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이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진짜 성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든 주께로 가지는 않고 논리를 따지거나 입씨름을 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 가기보다는 슬픔을 택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는 마지막 순간의 '내 모습 이대로' 오기보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예수님께 가는 것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영적 완고함이라도 당신에게 남아있는 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큰일을 부탁하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것은 단지 "오라"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당신이 이 말씀을 들으면 당신은 주께로 가기 전에 당신 안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주님께로 오는 것을 막는 그 어떤 것이라도 도끼로 그 뿌리를 잘라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당신이 이 한 가지를 기꺼이 하기 전에는 절대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알려주시지만,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그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당신의 요구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으며 "아, 이번에는 제대로 된 것 같아"라는 느낌을 가지고 떠났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빈손으로 떠납니다. 사실은 당신이 기도하는 내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잡아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주님의 손을 잡게 하시려고 손을 내밀고 서 계셨습니다. 확고하고 변함없으며 지치지 않는 주님의 인내를 생각하십시오. "내게로 오라"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8일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따라 이런 제목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지난 3일 동안 여러분들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이 구속, 구원 그리고 리컨시리에이션, 중생, 화해. 이런 굉장히 어려운 신학적인 주제를 우리가 다루었습니다. 왜 챔버스는 아니 비디는 이 어려운 주제를 10월달에 배치했을까? 저 혼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울한 날씨에 추운 날씨에 이 주제를 다루었더라면 더 힘들었을 텐데 화창한 10월 이 좋은 가을에 어려운 주제를 다루게 한 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이 좋은 날, 캄 다운하고 또 말씀 속으로 좀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또 가장 좋은 시즌에 좀 어려운 말씀을 우리 안에 소화하는 것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의하시나요? 뭐 동의 안 해도 할 수 없구요.

진짜 성도

구원의 보편성과 독특성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오랜 논쟁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보편성과 독특성. 오늘도 예사롭지 않은 주제처럼 들리죠?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주셨는데 이 보편성이 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는 대목에서 아주 편협한 사랑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제 묵상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은혜를 다루었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 위에 오셔서 화해, 리콘실리에이션을 이루신 것을 구원 계획이라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의 원 제목은 그리스도의 배타성(유일성) 영어로는 The exclusiveness of Christ라고 되어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내게로 오라는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보편성과 배타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보편성을 일반 은총이라고 말한다면, 배타성은 개인적 특별은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말 중의 하나가 주님께만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성도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주께 오라는 말씀이 어떤 걸림돌도 되지 않지만 만일 가짜 성도라면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리를 가지고 따지고 입씨름할 것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조금이라도 주저하고 있다면 그분을 온전히 우리 삶의 구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안에 자아가 살아 있어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려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챔버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아무리 작은 영적 완고함이라도 당신에게 남아있는 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큰일을 부탁하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것은 단지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관계,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거룩함이나 겸손 자체도 추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생명 되시는 주님만을 추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매일 세상에 나가서 선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매일 매 순간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와 은혜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포기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가난해져서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때 '내게로 오라'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인내

오로지 주님께만 나아오라는 배타성은 끊임없는 인내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초청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초청장을 보내시지만 우리 안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결단이 있을 때에야 이 초청에 응하게 됩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주님께로 오는 것을 막는 그 어떤 것이라도 도끼로 그 뿌리를 잘라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당신이 이 한 가지를 기꺼이 하기 전에는 절대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초청이 결코 강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주님께로 가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을 알려주시지만 우리의 의지적 결단이 없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챔버스의 표현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당신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알려주시지만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그 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영적 완고함은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영적완고함으로 인해 우리는 성령님의 계시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의 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실 때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기도문을 읽어드려요.
"주 예수님, 저를 지배하는 모든 것을 지금 내려놓습니다. 제 안과 바깥에서 날뛰는 수많은 두려움을 떨쳐내도록 도와주소서. 온갖 불안감과 낮은 자존감을 제하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저를 빚어 주소서.
주님의 침묵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길 원합니다. 거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힘과 용기를 얻어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겠사오니 저와 함께 하여 주소서 저를 당신의 집으로 부르시어 주님의 신비를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지금 그리고 항상 함께하여 주소서. 아멘."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따라 주님의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은 주님께서 쓴 뿌리를 제거하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고 주님의 손을 꼭 잡고 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요구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또 주님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양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로지 주님의 손을 붙들기를 여전히 기다리시며 인내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배타성은 완고함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인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배타성은 그 어떤 것도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배타성은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놀라운 기회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도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고, 우리가 실망하고 떠나갈 때에도 여전히 손 내밀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은 주님께서 내미시는 그 손을 잡았습니까? 아니면 놓지 못한 것으로 인해 아직도 주저하고 있습니까?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참 자비로우신 주님은 어느 때 우리들에게 너무 완고하게 보이고 완고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보편적인 은혜를 내게로 오라고 하는 말씀을 통해 참 좁게 느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내게로 오라는 이 주님의 말씀의 배타성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고 하는 주님의 인자하심이요 주님의 기다리심이요 주님의 사랑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내게로 오라고 하는 그 말씀이 우리들의 삶에 불평과 불만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임하는 가장 큰 축복으로 고백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구원계획과 개인적 적용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해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


죄는 근본적으로 관계입니다.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강력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그릇된 '존재 상태'가 죄인이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이고 뿌리 깊은 죄성을 해결하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죄악들'을 다룹니다. 성경만이 죄를 다룹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제일 먼저 직시하는 것은 죄의 유전이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사람의 마음을 찔러 쪼개는 능력을 잃은 이유는 바로 복음을 제시할 때 이 점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으로 짓는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죄의 유전을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아들'이 죄인 되게 하심으로 죄인을 성도 되게 하심 성경 전반에 걸쳐 게시되는 내용은 주님께서 우리를 동정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일체가 되심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마음을 다해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어깨에 지시고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죄인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바탕 위에 전 인류를 두셨습니다. 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대로 인류를 회복시키셨으며 누구든지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구속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며 완벽하게 끝났고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각 개인의 문제입니다. 구속의 계시와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구원을 실제로 경험하고 의식하는 문제는 언제나 구별되어야 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7일 구원 계획과 개인적 적용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오늘 묵상의 원 제목은 한 단어, reconciliati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화해라는 말입니다. 즉 죄를 관계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죄를 이해하는 일관된 관점은 그릇된 일이 아니라 그릇된 존재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구속을 단순히 죄를 해결하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유전 형질을 바꾸는 것으로 보았던 것처럼 말이죠.
챔버스가 보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도 여기에 존재하는데, 종교들이 죄악들 이런 부분들을 다룬다면 기독교는 죄, 죄의 본성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죄악들이란 존재론적으로 죄의 유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챔버스의 말에 의하면 성경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으로 짓는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죄의 유전을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챔버스의 [주의 형상을 본받아]라는 책에서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죠.
죄(sin)의 본질은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 이는 모든 범죄행위에 가장 깊이 뿌리내려 있다. 죄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 당신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지은 죄악(sins)이지 '죄의 유전'이 아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씻겨져야 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시는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아무런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에게 죄란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 주장이기 때문에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는 당장 반감을 느낄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려줄 때 사람들은 크게 분개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어떻게 인류가 가지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친아들을 죄인 되게 하심으로 이 땅에 죄인들을 성도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 후서 5장 21절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일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동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그분이 우리와 일체가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존재를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우리의 존재를 바꾸어 회복시키시는 것이었고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죄악들을 다루지 않고, 존재를 다룬다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구속의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완벽하게 그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무엇일까요?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각 개인의 문제입니다. 구속의 계시와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구원을 실제로 경험하고 의식하는 문제는 언제나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웨슬리의 구원과 은혜를 보면 이해하는데 좀 더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웨슬리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라는 말로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사건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셨어요. 즉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인류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죠. 하지만 이 구원을 일반론에서 특별한 나에게로 향하게 만들 때 그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내가 경험하고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글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우리들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묵상글에서 나오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순종, 항복, 양도 그리고 영적 가난함 같은 그런 말들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책 [구원의 은혜]에 보면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인용했던 글을 다시 한번 오늘 묵상해서 인용하려고 합니다. 바로 기억이 나실지 몰라요.
누군가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서, 말 한마디로 물이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이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성취할 자가 없다. 당신의 본성이 바뀐다면 나이아가라를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욕망의 방향과 생애 흐름을 바꾸어, 당신의 전 존재가 그분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분께 가까이 나가도록 바꾸어 주실 수 있다. 사실 주님은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을 약속해 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이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아멘"이 된다. 이 언약을 굳게 잡자. 이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우리에게도 적용시키자. 그리하면 이 언약이 분명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가지고 있는 핵심은 일반적으로 계시된 구속을 개인적인 삶에서 적용하고 체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의 삶에 구원의 은혜가 임했음을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구원의 역사가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계획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누군가를 위한 은혜로 그치지 않도록, 그 역사가 나에게 적용되고 내 믿음에 적용되고 내 믿음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백했던 그 구원의 은혜가 오늘 나에게도 임했습니다' 고백하게 하시고 '주님 나를 여기에 이르게 하시고 주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사오니 내가 구원받은 자로 이렇게 살아가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구체적인 삶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거룩한 유전형질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
갈라디아서 1장 16절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해결하셔야 하는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더 이상 "나는 거룩하지 않고 거룩해질 가능성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유전형질을 내게 주십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뿐이셨다면 주님의 가르침은 절망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중생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내 안에 주님의 거룩한 유전 형질을 넣으실 수 있는 분이라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져야 한다고 요구하시는 의미를 알기 시작합니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안에 있었던 유전적인 성향을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기준은 우리 안에 넣으신 그 성향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결정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나의 죄에 대한 판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절박해질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의 영에 넣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영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에 의해 힘을 얻게 되면서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갈 4:19)됩니다. 구속의 영적인 기적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성향을 넣으실 수 있다는 것이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절박하게 되어 나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될 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절박한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내가 그 필요를 의식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 성향 곧 책임 있게 순종하는 존재를 내 안에 넣으실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 의해 죄의 성향이 전 인류에게 들어온 것같이, 다른 '사람'에 의해 성령께서 전 인류에 들어오셨습니다. 구속은 죄의 유전으로부터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흠 없는 유전 곧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6일 거룩한 유전형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중생이 의미하는 것

오늘 묵상은 어제에 이어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인 중생의 본질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났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전제가 필요한 것이죠. 본문을 제가 조금 의역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나에게는 거룩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유전 형질을 내게 주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져야 한다라고 말씀만 하셨지만, 이 말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절망스럽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우리 안에 이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거룩함을 가능케 하는 유전 형질을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구속의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죠.
챔버스의 글입니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안에 있었던 유전적인 성향을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말씀과 이어서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하는 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그리스도의 유전형질로 바꾸어주시는 것, 그것이 구원, 그것이 참된 의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생으로 머물지 않고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 위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전제를 기준으로 하신 말씀이죠.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챔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장에서 결정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나의 죄에 대한 판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가 왜 중요할까요? 우리의 죄에 대한 판결은 죽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 판결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는 무한한 절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챔버스의 묵상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말이죠. 우리가 완전히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영이 절망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시작점이 됩니다. 절망의 영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능력이 시작되는 것인데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중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챔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구속의 영적인 기적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성향을 넣으실 수 있다는 것이요. 나는 새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절박함이 낳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가난해져서 주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지경에 이르게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에게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절박함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기독교가 역설적인 종교인 것은 절망에서 희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우리를 뭔가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고난 본성에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책임적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그 순종이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신학적인 문제인데, 한 사람에 의해 죄의 성향이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이 부분은 어제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죠.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유전된 것이 아니라 죄의 성향이 유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한 사람에 의해 성령께서 온 인류에게 들어오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흠 없는 유전형질, 즉 중생의 본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존 칼빈을 통해 신학적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령의 성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크리스천 투데이에 기고한 배본철 교수의 글이 잘 정리가 되어 있어 여기에서 소개합니다.
칼빈의 성령론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성령은 곧 성화의 영으로서 신자에게 성화시키는 능력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에 젖붙임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또 우리는 그분의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이 같은 중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옛사람에 대한 억제와 새로운 삶에의 참예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직접 비롯되며 중생의 최후 목적인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가 아직 실제적인 의와는 사실상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하여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완전한 자유를 지녔기 때문에 육신과 투쟁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사실이 그들을 계속적으로 시험받게 하는 영원한 전쟁터에 남아있게 하여 그들을 단련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약함을 깨닫게 하여 줄 수 있다"
중생의 사건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기질을 바꿔주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에 대항하여 싸우고 우리를 단련시켜 주신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께서는 절망의 유전형질을 소망의 형질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오늘 당신의 삶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 절망 가운데서 소망의 빛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생한 자의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많이 쓰던 말이 있습니다. 거듭났습니까? 중생했습니까? 오늘 챔버스의 묵상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우리들이 거듭났다는 것은 죄의 본질이었던 우리의 형질이 바뀌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죄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지만 우리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 능히 싸우려고 하는 의지가 우리에게 찾아왔는지를 보게 하시고 성령님의 도심을 요청케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절망스럽습니까?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소망을 가지며 성령님의 도심을 요청합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가운데 절망의 축복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절망 가운데 성령님의 보호심을 구하는 축복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절망 가운데 소망을 보는 축복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멸망의 인침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장 12절


성경은 하나님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전 인류를 벌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기질 곧 '자기 권리 주장'이 한 사람에 의해 전 인류에게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제거했다고 말합니다(히 9:26). 이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계시입니다. 죄의 성향은 부도덕이나 악행이 아니라 '나는 나 자신의 신'이라는 자기실현의 성향입니다. 이 성향은 예의 바른 도덕적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고, 버릇없는 부도덕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같은 근본 곧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 가득 찬 사람들과도 직면하셨고 청렴하며 도덕적인 고상한 사람들도 만나셨지만 그들의 도덕적 타락이나 성취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셨는데, 바로 사람의 성향이었습니다.
죄는 타고나는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속을 통해 죄를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유전으로 저주 아래 놓인 전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서도 사람이 물려받은 죄의 유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정죄는 내가 죄의 유전과 함께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의 유전으로부터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주님을 거절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을 거절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멸망의 인침을 받게 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5일 멸망의 인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죄를 바라보는 시각

오늘 묵상의 본래 제목은 타락에 대한 편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신학사상을 성경신학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때 불만을 이야기하며 토론이 이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의해서 들으셔야 될 부분,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은 신학적 논쟁을 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스왈드 챔버스라고 하는 사람의 신앙에 고백이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조금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고 특별히 죄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어떤 죄 성향, 이런  죄의 기질 이런 부분들이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한번 이렇게 소화를 잘하면서 듣고 적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챔버스가 이런 말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사람이 죄 때문에 전 인류를 벌 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 기질 곧 '자기 권리 주장'이 한 사람에 의해 전 인류에게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챔버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죄로는 죄와 죄의 경향을 분리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보편적으로 우리는 죄와 죄의 경향을 분리하지 않고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죄가 왔다 이렇게 생각하죠. 챔버스에 의하면 인류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야기된 죄의 기질로 인해 우리가 죄를 짓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기질이 유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 속에 찾아온 이 죄의 기질을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기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챔버스의 말을 옮겨 보았습니다. 죄의 성향은 부도덕이나 악행이 아니라 '나는 나 자신의 신'이라는 자기실현의 성향입니다. 이 성향은 예의 바른 도덕적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고, 버릇없는 부도덕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같은 근본 곧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바로 챔버스가 말하는 죄에 대한 편견이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죄를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인간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경향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하는 죄의 모습은 그것이 실제적인 선인가 악인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죄의 근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행하는 것, 그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유전되어 있는 죄의 성향인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는 책에 이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읽어 드리겠습니다.
자아실현은 현대인들의 표현이다. 현대인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 종교적인 사람이 되라 당신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똑바로 서라"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아실현에 근거하여 서 있는 선하고 흠 없는 인생이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멀리한다.
오늘날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의 외적인 죄가 아니라 자아실현을 원하는 이상들이다. 이러한 자아실현의 이상은 더욱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간들을 분리시키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그리스도 실현이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고상한 사람들을 만나셔서 고쳐 주신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내적 성향이었습니다. 남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성취를 위해 행하는 것은 위선이요,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간음하는 죄를 지은 여인에게 대하여도 행위보다는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본성에 집중하시고 고쳐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죄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챔버스에 의하면 죄는 타고나는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의 구석을 통해 죄를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유전으로 저주 아래 놓인 전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서도 사람이 물려받은 죄의 유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 말씀이 이 부분을 명확히 압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 보면 정죄, 즉 심판이란 우리가 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을 거절하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타락에 대한 편견이란 분명합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거절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유전적으로 가지고 태어나 가능성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슬퍼하지 마시고 죄의 기질을 가진 우리의 성향을 고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는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은 것보다 죄를 짓는 우리의 본성이 변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지금 지은 우리의 죄 문제보다 근본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우리의 본성이 변하는 것, 이것이 구원의 은혜라는 말이죠.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쓴 [구원의 은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 서서, 말 한마디로 물이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이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성취할 자가 없다. 당신의 본성이 바뀐다면 나이아가라를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보다 큰 이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욕망의 방향과 생애 흐름을 바꾸어, 당신의 전 존재가 그분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분께 가까이 나가도록 바꾸실 수 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타고나는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속을 통해 죄를 다루십니다.
구속의 은혜는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에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적입니다. 타고난 죄의 본성이 흐르는 우리의 존재 방향과 흐름을 하나님께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와 같은 구속의 은혜를 우리가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문제는 악행이나 부도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어 자신을 실현하려는 경향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당신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챔버스를 통해 오늘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 그 죄의 결과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으려고 하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성향성에 대하여 묻고 계십니다. 지금 죄를 짓고 안 짓고의 문제보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진정으로 그 주님을 내가 인격적으로 모셔 드리고 있는지, 그 주님으로 인하여 나의 본성이 변화하고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오늘 더 깊은 단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내 본성이 변해 가고 있는지, 깊이 묵상하며 오늘 하루 주님을 더 닮아 가며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다시 한번 고백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비전의 빛 가운데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
고린도전서 1장 2절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비전을 가졌었지만 그 비전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계곡에 있을 때, 곧 우리가 정말 선택된 사람들인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곳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본 비전대로 되려면 반드시 우리를 다듬는 충격들이 오게 되는데, 이에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다듬어져서 쓰임 받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다듬어지는 역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비전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정상에서 안일하게 있기를 원하며 받은 비전을 추억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황홀경이나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명상을 통해 본 것 외에 비전 가운데 보았던 것을 의지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곧 그 비전의 빛 가운데서 현실적으로 살아감으로 그 비전이 진짜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훈련은 이 방향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요구를 알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나'라는 낮은 자아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 언제나 골을 냅니다. 주님의 분노 앞에서 '나'라는 자아가 완전히 시들게 하십시오.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출 3:14). 주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번개 빛처럼 우리를 찾아내실 것입니다. 하나님만큼 인간을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4일 비전의 빛 가운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깨어짐을 통해

비전을 보는 것과 비전을 이루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비전을 보았지만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럼 왜 비전을 이루지 못할까요? 챔버스는 계속해서 변화산 정상에서의 체험과 계곡으로 내려와서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비전을 보는 것은 변화산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 비전이 이루어지는 곳은 산에서 내려와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계곡입니다. 우리가 비전을 가진 자로 살아가면서 선택받은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곳이 바로 우리 삶의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본 비전대로 되려면 반드시 우리를 다듬는 충격들이 오게 되는데, 이에 우리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상을 살아내는 계곡은 우리의 삶에서 부딪치는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많은 상처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깨어짐이라는 과정이죠. 마치 우리 인생이 모루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망치로 1번, 2번 맞을 때마다 부수적인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비전의 순수함만 남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아프고 힘든 것이죠.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깨어짐의 영성이라는 표현인데 깨어진 만큼 우리를 하나님과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아봐야 든든한 반석이신 주님을 조금 알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리고 아픈 금이 생겨봐야 그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잃어봐야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깨어짐이 우리에게 참 커다란 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 '깨어짐'은 고통이 아니라 '깨달음'의 시간이 됩니다.

비전을 알게 되는 때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비전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깨닫고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전을 깨닫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 비전을 이루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만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상에서 받은 비전을 추억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황홀한 경험을 현실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챔버스에 의하면 곧 그 비전의 빛 가운데서 현실적으로 살아감으로 그 비전이 진짜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아시아로 가려던 사도바울의 방향을 성령께서 유럽으로 바꾸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명한 이야기죠. 사도바울은 들어와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빌립보로 향하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힌 있는 신세가 되고 말죠. 중요한 것은 감옥 안에서 바울과 실라는 찬성하고 기도했으며 그 안에서 확실하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실현하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옥문이 열리고 도망갈 기회가 생겼으나 이들은 도망가지 않고 옥을 지키는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바로 이 순간 바울에게 주신 비전이 실체가 되는 순간입니다.
비전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찮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자아가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전의 성취는 온전한 주의 다스림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나'라는 낮은 자아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실 때 언제나 골을 냅니다. 주님의 분노 앞에서 '나'라는 자아가 완전히 시들게 하십시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온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겨두지 마십시오. 죽지 않은 것은 진정한 여러분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죽음을 떨치고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하게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그분의 계획 앞에 우리가 복종할 때 완벽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비전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비전을 실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 질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비전은 무엇인가요?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오늘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참 아프고 힘든 도전을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비전을 네가 이루어 가고 있느냐? 그 비전을 위해 넌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복종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우리들에게 무겁게 물어보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랑하는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 내 마음을 뜨겁게 하셨던 그 비전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언제부터인가 차갑게 식어진 비전이 있다면 사명을 살아내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이 있다면, 오늘 하루 다시 회복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뜨겁게 불타오르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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