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열정과 도전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20절


예수 그리스도는 "가서 영혼을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가서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당신 자신이 먼저 제자가 되지 않으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첫 번째 선교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악령들이 그들에게 순복하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역이 성공했다고 기뻐하지 말라 가장 큰 기쁨은 너희들이 나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단 한 가지만 목적은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영혼을 향한 열정을 가진 자들 중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열정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관점을 갖도록 사람들을 회심자로 만들겠다는 욕망에서 온 열정도 있습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큰 도전은 사람이 구원받기 어렵다거나 신앙을 버리는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가 어렵다거나 무관심과 냉담이 너무 깊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끊임없이 유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마 9:28)라고 주님은 계속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개인적 상황에 다 적용됩니다.
한 가지 위대한 도전은 "나는 나의 부활하신 주님을 아는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너무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충분히 지혜롭습니까? 아니면 선교사를 향한 유일한 부르심 곧 예수 그리스도만을 무한하게 신뢰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초자연적 자리를 포기하려고 합니까?
만일 내가 다른 수단을 취한다면, 나는 주님에 의해 마련된 모든 수단들을 다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마 28:18-19)


무엇을 하는가?

어제는 선교사의 자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선교 방법에 대한 묵상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선교 방법의 첫 번째는 우리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않으면 누구도 제자를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교 방법에 있어서 가장 집중해야 하는 것어떤 일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제자를 만들까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사역에 집중하다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곤 합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동료들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도 경험합니다. 사실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귀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지상 명령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제자가 되지 못하면 누구도 제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역을 잘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후 성공적으로 사역을 마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챔버스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역이 성공했다고 기뻐하지 말라 가장 큰 기쁨은 너희들이 나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에게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열정이 아니라 자신의 열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경향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참아주시고 용납하셔서 제자 삼아 주셨는데 우리는 누군가를 참아주지 못하고 그저 내 신앙의 복제품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품을 닮은 사람들로 만들어 가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이죠.
이는 열정은 있으나 방법이 잘못된 태도입니다.
전 스터트 목사님이 제자도라는 책에서 선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글을 좀 인용해 보겠습니다.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된 한 힌두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인도는 내일이면 너희 휘하에 있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아랍의 무슬림이었던 이스칸다르 야디드(Island are Jadeed) 목사의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이슬람은 없을 것이다."이 말을 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나는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중요한 이야기를 잔 스토트 목사님이 하고 있죠.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내가 먼저 진정한 제자가 되지 않는다면 절대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품어야 하는 것

뜨거운 가슴을 품고 끝까지 선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믿음을 가진 것 같다가도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들 또한 변함없이 냉담한 사람들을 보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타인의 반응이 아닙니다.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끊임없이 요구하시는 것은 결과물이 아닙니다. 아직도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선교 사역의 실패는 결과물이 미흡하기 때문이 아니라 임과의 관계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선교 사역의 실패는 결과물이 미흡하기 때문에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주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라고 주님은 계속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개인적 상황에 다 적용됩니다. 한 가지 위대한 도전은 '나는 나의 부활하신 주님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의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기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믿지 못하고 주님의 방법이 어리석게 보인다면 우리는 다른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수단을 사용하는 순간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라는 주님의 명령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의 순간에 믿음을 확증해야 하는 기로에 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순간과 결단의 때가 오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을지가 결정되는 것이죠. 우리가 잘 아는 짐 엘리엇이 순교를 당한 후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남편에 이어 에콰도르에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가장 믿었던 순간에 가장 어려운 믿음의 시험을 당했던 그녀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에게 좋은 도전 좋은 예가 됩니다. 그녀가 썼던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은 마카다오라는 사람을 보면 보내주셨다 그는 스페인어와 콜로라도 말을 둘 다 할 줄 알았고 나는 에콰도르 공용어인 스페인어를 배운 상태였기 때문에 약 두 달간 이른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평소처럼 내 방에서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총성이 들리는 건 사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 총성은 달랐다 총성 이후에 비명과 말이 질주하는 소리 사람들이 도망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황급히 밖으로 나갔을 때 마카다오가 방금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마카다오는 세상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마카다오 말고 스페인어와 콜로라도 말을 둘 다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내 믿음은 하나님이 내 기도에 내가 원하는 응답을 주셔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하나님의 성품 위에 내 믿음을 다시 세워야 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이런 안타까운 일을 허락하신다는 모순적인 상황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했다. 나는 이런 일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일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두 가지 선택 사항만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든가 믿지 않든가 내 삶이 영원한 심판에 안겨 있다고 믿든가 우연에 달려있다고 하나님을 믿든가 부정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간 지점은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주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면 주님이 하시는 일이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지금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열심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 사역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결과물을 얻는가 보다 오늘 내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올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하루를 살아가야 되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 안에 용납되지 않는 것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들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또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오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서게 하여 주옵시고 어떤 일 가운데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히 죽게 우리의 삶을 맡기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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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최고봉



보냄받은 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장 21절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은 것 같이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선교사의 마음에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어야지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의 영감을 앞세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의 성공을 이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감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 뒤에 명령을 따르는 우리의 결단 뒤에 따라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선교사의 이상은 주님께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함을 유지하는 일, 그분의 관점을 내 안에 유지하는 것을 가장 귀히 여기십시오.
선교사역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희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한 동정심이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의미를 완전하게 압도해 버립니다. 그 필요가 너무 크고 조건들이 너무 복잡해서 모든 정신력이 흔들리고 쓰러집니다. 선교사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거나 교육을 시키거나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마 28 :19)
귀히 쓰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예리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였던가!"
그러나 그들의 예리한 지혜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의 지혜를 칭찬하고 높이려 합니다. 귀히 쓰임받았던 이들은 어리석을 정도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초자연적인 수단을 의지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에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에 공로를 돌려야 합니다.


선교사란?

지난 9월 4일 묵상에서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상에서 부르시고 훈련의 과정을 통해 으깨셔서 포도주를 만드시고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도록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오늘은 선교사의 특징이 무엇인지 중점적으로 다루고 내일 묵상을 통해서는 선교 방법에 대하여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선교사란 무엇일까요?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의해 보냄을 받은 것 같이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선교사의 마음에 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설로스 오르티즈 목사가 쓴 제자입니까에 보면, 바로 이 부분에서 고민했던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열심히 목회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도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했던 고민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결국 너는 지금 교회가 아니라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누구도 아버지가 없다. 너는 교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분주한 고아원 원장이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고 운영비를 지급하고 우유병을 챙긴다 하지만 너는 물론 어느 교역자도 실제로 갓난아기를 양육하고 있지 않다." 그분 말씀이 또 옳았다.

후안가루로 소르트디 목사님이 교회가 한참 부흥하던 때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자라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가 고뇌했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여념없을 때가 있습니다. 보냄받은 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명확하게 구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자신이 수고했다고 칭찬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내면에는 주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면서 평가받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선교사역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선교사의 이상은 주님께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달려갈 길을 다 간 후에 우리를 보내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입니다. 평생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회자와 다른 성도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당신의 사역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선교사역은 결과가 아닌 충성의 과정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 사역의 제 1목적

늘 그랬듯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인격적 친밀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친밀함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의 관점을 내 안에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친밀함에 간격이 생기면 자꾸 다른 것들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주의하십시오.
챔버스의 말입니다.
선교사역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희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한 동정심이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의미를 완전하게 압도해 버립니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선행을 베푸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만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선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사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선교사역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 그들의 피로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에 충실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는 자들은 자신의 지혜를 사용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는 자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서 자신이 칭찬받으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이 하신 일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나고 사람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따라 평생을 사역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 버린 자리에는 수치만 남습니다.
사도바울이 가장 염려했던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부터 27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돌아가신 하영조 목사님이 나는 선교에 목숨을 걸었다 해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이나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가라고 하시면 하고 가라고 하시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시면 가지 않으면 됩니다. 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록해야 될 한 줄 노트

선교사의 마음에는 사람의 피로가 아닌 예수님의 명령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선교사란 무엇인지 하나님의 우리를 왜 보내셨는지 보냄받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성공을 꿈꿀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뜻을 열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참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는 허무함 치심 같은 것들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 때문에 아니라 우리의 뜻이 꺾어졌을 때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감정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우리들의 인생의 결과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최선을 다해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충성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여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보내심을 받은 자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큰 기쁨과 우리의 인 인생의 의미가 되는 고백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룻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주님은 나의 최고봉

하나님의 목적과 소명대로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린도전서 9장 22절


그리스도인 일꾼은 하찮은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고결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중요한 사명 때문에 예외적인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의 지성으로 이 중요한 사명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가슴으로 이 사명에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자로 밀려날 것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으로 주의 일꾼이 되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주권 기본적인 은혜와 주님의 능하신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바울의 온 마음과 생각과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위대한 사명에 사로잡혔으며 한순간도 초점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언제나 직면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입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당신의 신조에 위대한 이 말씀을 두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굽히시고 깨뜨리시고 빚으십니다. 왜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주님이 이 일을 하시는 것은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인데 그것은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께서 우리를 심으신 반석 위에 다른 사람도 심을 수 있게 됩니다.
일꾼이 되겠다고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의 소명을 주셨다면 당신이 좌로나 우로 치우칠 경우 큰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소명이 임하면 소명을 받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하실 것입니다. 또한 소명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다루실 것입니다. 그분의 방법으로 당신을 다루도록 하십시오.


부서져야 할 생각들

오늘 묵상 역시 원문 제목이 훨씬 더 직설적으로 우리들에게 와닿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어로 The eternal crush of things. 멈추지 않고 깨어져야 할 것들 오늘 그것이 무 엇인지를 아는 것이 묵상의 목적이 되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오늘 제목처럼 하나님의 목적과 사명대로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묵상의 첫 문장은 사역자들이 계속해서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챔버스가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 일꾼은 하찮은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고결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오스발드 챔버스의 기독교 진리라는 책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은 봉사가 아니라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하찮은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고결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 나가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다른 사람에 대한 내 관심에 나를 일치시키려 하지 말고 그를 향한 내 관심에 너를 일치시켜라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곳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주의 보열로 거룩한 자가 되었다면 주께서 보내시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묵상을 통해 우리가 지녀야 할 하나님의 관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우리가 부서야 하는 인간적 생각에 대한 묵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명이 주어지면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할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특별해지는 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이든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갈 때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굽히시고 깨뜨리시고 왜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챔버스가 끊임없이 인용하는 구절이 있죠.
요한복음 15장 16절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굽히시고 깨뜨리시고 빚으시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소명대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의식이 절대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우리는 선택에 항복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분명한데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그대로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기어이 사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삶에서 깨어지는 아픔과 짓이겨지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택하심 가운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픔이 택함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스림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영원히 깨어져야 할 것이 있음을 늘 기억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소명대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2015년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으로라는 제목으로 써 놓았던 제 글이 있는데, 오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올해로가 만나교회를 목회하기 시작한 지 만 11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때는 교인들을 설득해서 끌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때에는 저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십여 년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제가 목회를 가장 편안하게 잘할 수 있었던 때는 제가 가진 것으로 교인들을 설득하려고 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늘 제가 아프고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고 나면 교인들이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저를 이해하려는 교인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지혜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회를 한다는 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께서는 힘으로 증명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힘을 쓰지 않는 방법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위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과 피흘림을 통해 그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문제를 제기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교만과 우월성 비교로 인한 분열에 대하여 지혜와 표적을 구함으로 신앙을 부인하는 세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깨뜨리시고 빚으심을 기억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선택 앞에 당신은 무엇을 내려놓았을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택하신 자로 어떻게 쓰임받아야 할지를 묵상해서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소명대로 쓰임받기 위하여 우리 아래 부서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고 우리를 짓 이기시고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임을 배웠습니다. 오늘 하루를 지나가는 동안 우리들이 깨어질 때 우리들이 아픔을 당할 때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기억하며 고백하게 하여 주옵시고 주님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빚으셔서 하나님의 마음대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놓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귀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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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관심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후서 2장 14절


하나님의 관점은 사역자가 최선을 다해 최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최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이는 매일 모든 순간마다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유한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외부의 어떤 힘도 관점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지해야 하는 관점은 우리는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이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행군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시장에 진열된 전시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알리기 위한 4명에 나의 삶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관점들은 얼마나 사소합니까? 나는 예수님을 위해 외롭게 홀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주를 위해 마지막 요새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이미 승리자의 반열에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관계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승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당신에게 실질적으로 역사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가진 기쁨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반역자를 하나님께서 붙잡으셔서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살아가는 모든 목적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주님께 사로잡힌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하늘과 땅에 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전한 승리를 얻었기에 승리를 얻는 방법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승리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사로잡으셨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승리 외에 다른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를 통해 승리자 이상의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우리는 예수님의 향기로 휩싸여 있기에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은 하나의 단어이죠. The viewpoint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 이렇게 해석했는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대치에 묵상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점은 다른 말로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은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고린도서 2장 14절 말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사도바울의 이 고백은 하나님 관점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한 말이죠. 사실 챔버스의 다음 묵상은 얼핏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전한 승리를 얻었기에 승리를 얻는 방법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승리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사로잡으셨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승리 외에 다른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를 통해 승리자 이상의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에서 승리하는 비결 같은 것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챔버스는 이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방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얻은 승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 승리를 쟁취하고 난 후 그는 이 성취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톰 라이트의 바울 평전에 보면, 사도바울의 이러한 면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듭거듭 기도로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그는 호흡의 박자에 맞춰 기도로 기도한다. 그는 그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자아 속에 자리하신 영의 호흡을 따라 기도로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자신의 충성 자신의 사랑을 다시 한번 선포한다. 한 분 하나님 한 주를 선포한다. 한이라는 말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가 평생에 걸쳐 한 일은 하나님 나라 그리고 주위신 예수를 누구에게나 드러내 놓고 거침없이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형자가 칼을 뽑은 지금도 기도하며 일을 한다. 그는 이 한 분 하나님을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숨까지 바쳐 사랑한다.

사도바울의 그를 보면 언제나 기쁨과 감격이 묻어납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를 선포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선포한 것은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 묵상글의 첫 문장이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사역자가 최선을 다해 최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최상이어야 합니다.

이 문장의 의미가 명확하게 이해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할 때 본래 의미가 많이 희석되어 버렸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관점, 즉 세계관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거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최상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최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유지해야 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알리기 위한 행군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시장에 진열된 전시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알리기 위한 사명에 나의 삶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승리를 선포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스스로 주님을 위해 외로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마지막 요새를 지키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승리자의 반열에 있으며 이미 승리 가운데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삶 한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 부활의 주와 함께 살라 책에 나오는 글로 오늘 묵상을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구원자와 충돌했고 구원자가 승리하셨다 사도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셨어야 할 분이 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며 여기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다시 오셨다는 확신이었다.
그 후 몇 10년 동안 그들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수많은 밤을 한데에서 자고 굶주림에 속이 쓰리고 뼈속까지 비에 젖고 돌에 맞아 몸이 으스러질 지경이 된다. 또한 난파를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순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억 속에는 그들로 하여금 결코 뒤돌아보지 않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배반을 당하신 분이 배반 환자들을 찾아오신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들을 질책하려 하심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려 하십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그분을 잊었다고 꾸짖으려 하심이 아니라 그분을 기억하라고 명하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죄인들의 용서받은 것을 기억하라
참 좋은 글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그분은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분이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리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최고의 존재로 다가오셨고 최상의 것을 가르쳐 주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줄 노트

이미 승리 가운데 있음을 알면서 사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승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될 중요한 관점 우리의 세계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승리하셨고 우리는 승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한가운데서 죄악과 맞물려 힘겹게 싸울 때에도 치열하게 싸울 때에도 담대하게 먼저 승리를 선포하는 사람들 이겨놓고 싸우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한나는 우리가 하루 만나는 일상 하나하나 가운데서 한 사람 가운데서 상황 하나하나 가운데서 승리 이를 고백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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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편견을 장려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여 제거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특이한 편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자신을 다루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엄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셔야 하지 그러나 물론 주님께서는 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아실 거야. 우리는 우리의 편견이 주님께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편견을 지지하는 대신에 오히려 의도적으로 제거해 나가십니다. 우리의 편견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맡기고 주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는 것은 귀한 영적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어떤 편견을 가져오든 별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단 한 가지는 우리의 무조건적인 항복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이전 옛 모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과거의 의식들도 사라지고 사물에 대한 과거의 태도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욕심도 없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도 않고 많으며 사람들이 주는 상처에 무감각할 수 있는 그러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언제나 온유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생명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옛사람이 사는 것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 단순하고 완전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오직 하나님 그분만을 원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다 거두어 가신다고 할지라도 주를 향한 당신의 믿음이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에 대해 염려하며 골치를 썩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이 세상이 볼 수 없는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를 우리는 현실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의 문제

오늘 묵상 원문 제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영어로 Not a bit of it!이라고 하는 말인데 '전혀 아니었어' 이런 말입니다. 즉 '우리의 생각이 전혀 아니었어' 편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편견의 사전적 정의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입니다. 우리는 왜 편견을 버리지도 벗어나지도 못할까요?
 
18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에드먼드 버크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편견을 던져버리는 대신 상당히 소중히 여긴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자 그렇다면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은 무엇일까요?
챔버스의 글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자신을 다루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편견이란 말이죠. 이 문장을 깊숙이 묵상해 오십시오.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다루시고 우리의 독특한 생각을 지지해 주시리라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이 옳아 그리고 하나님은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아실 거야. 문제는 이러한 생각이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 편견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지지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를 바꾸어 가시는 분입니다.
자 이 문장을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지지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를 바꾸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은 내 편이야'라고 말을 하는데 진정한 신앙인은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 가는 것이죠.
영적 훈련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다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느냐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항복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훈련의 과정에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지지하기보다는 잘못된 생각을 계속해서 제거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종종 기도하면서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참 많습니다. 나의 기도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즉 나의 생각이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가장 좋은 길임을 챔버스가 묵상해서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전혀 아니었어 Not a bit of it .  우리의 편견이 제거될 때 바로 고백하는 말 전혀 그게 아니었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지지하시리라는 편견을 버리십시오.
기도는 나를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편견 극복하기

그렇다면 편견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새롭게 창조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편견이 사라지면 과거의 생각이 바뀌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뀝니다. 오늘 묵상에서 캔버스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란 편견이 없는 사람입니다. 욕심도 없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사람들이 주는 상처에 무감각해지고,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되는 것. 성매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온유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어떻게 그런 상태가 가능할까요? 성령께서 우리 아내 역사하실 때입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옛사람이 사는 것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 단순하고 완전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오직 하나님 그분만을 원하는 믿음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을 때는 원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오로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만 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던 축복을 다 거두어 가시고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심을 분명히 믿는다면 어떠한 일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 환란과 풍파가 우리를 향해 다가올 때 염려하며 주저앉지 않을 것입니다.
챔버스가 아주 멋진 표현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볼 수 없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우리는 현실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영성개발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영성이 밝아지는 것이죠.
헨리나우엔은 [두려움에서 사랑으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한한 사고의 틀 안에 갇히지 않으신다.
그래서 영성개발은 신에 대한 교만한 지식이 아니라 유식한 무지로 우리를 이끈다.
유식한 무지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내가 얼마나 편견이 가득한 존재인지, 즉 얼마나 무식한지를 깨닫는 유식이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이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묵상에서 이 찬양을 같이 불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 품에 품으소서 

우리의 참된 능력은 나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날아오르는 것, 주와 함께 거하는 것.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이 사라집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당신의 믿음이 어떤 일 때문에 흔들립니까 혹시 편견 때문은 아닙니까 흔들리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이 참 중요한 기도를 하나님께 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의 편견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나의 생각 나 중심적이었던 것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늘 기도했던 우리의 모습들 이제 그러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어떻게 거할 수 있을까? 주님과 어떻게 통행할 수 있을까? 우리의 편견이 제거되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주와 함께 날아오르는 사람들 주품에 거하는 사람들 그 어떤 풍랑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성령의 증거하심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장 16절)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흥정하려는 마음을 가지려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을 수행하기 전에 증거를 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실까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이유는 당신이 완전히 죽게 내려놓지 않는 한 당신 자신이 주님의 증거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 내려놓으면 하나님은 자기를 증거하십니다. 주님은 당장이라도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의 속성을 증거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실체가 아닌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감상적 감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속에 근거해 당신을 내려놓고 놓고 주제넘게 따지지 않는, 즉시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주십니다. 당신이 논리와 주장을 내려놓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증거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시게 했던 우리 자신의 무례함에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지 알고 싶으면 주께서 구원하시도록 맡기든지 아니면 주께서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십시오. 이 사람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 말고 마태복음 11장 28절을 시도해 보십시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주께로 오십시오.
만일 당신이 악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도하십시오. 성령은 주님의 구속을 증거하십니다. 성령은 다른 어떤 것도 증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논리를 증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연스러운 상식적인 결정을 내린 후에 성령의 증거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신의 속성 및 구속의 사역을 증거하실 뿐 절대로 우리의 이성을 증거해 주지 않으십니다.
만일 성령으로 우리의 이성을 증거하게 하려고 시도할 경우 당연히 어둠과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어리석음을 내버리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께서 성령의 증거를 주실 것입니다.



 

흥정하지 말라

오늘 묵상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영어로 barter라는 말인데 물물 교환하듯이 흥정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문제 있는 것 가장 위험한 태도가 성령님과 흥정하려는 경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님과 흥정할까요? 챔버스의 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을 수행하기 전에 증거를 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실까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이유는 당신이 완전히 죽게 내려놓지 않는 한 당신 자신이 주님의 증거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문장을 읽으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성령님의 증거를 요구할까요?
챔버스가 당신이 완전히 죽게 내려놓지 않는 한이라고 말하는데 저에게는 이렇게 이 부분이 이해가 됩니다. 사실 주님의 일을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안에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으나 하나님의 일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
사사기 6장에 사사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드온을 부르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수용할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하죠. 다른 곳은 다 마르고 양털만 적게 해달라고 또 다른 곳은 다 적고 양털만 마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양털 시험을 합니다. 증거를 통해 기드온은 하나님께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용하실 수 없었습니다.

오늘 묵상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양도하지 않는 한 성령께서 우리 삶에 확실하게 증거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데 증거를 얻는 방법은 두 손 들고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표현입니다.
당신이 구속에 근거해 당신을 내려놓고 주제넘게 따지지 않는, 즉시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주십니다.
당신이 논리와 주장을 내려놓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증거하십니다.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존재한 우리는 증거를 보여주시면 믿고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성령께서는 먼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아주 유명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지 알고 싶다면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지 알고 싶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경환 목사님이 쓴 나를 응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약해서 제가 이야기를 할 텐데 이야기를 오늘 묵상과 연결해 보면 어떨까요?
어느 바닷가에 갈매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갈매기는 바닷가에 버려진 썩은 물고기 한 마리를 입에 물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갈매기의 뒤를 따라 올라가죠 썩은 물고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다가 움켜쥐고 있던 썩은 물고기를 바다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일제히 그것을 쫓아 바다 쪽으로 날아갑니다. 그때 갈매기는 비로소 푸른 창공이 온통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움켜쥔 썩은 물고기를 포기하는 순간 드넓고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작고 하찮은 것을 포기한 순간 큰 것이 갈매기의 눈에 들어온 것이죠.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없습니다. 죽게 온전히 내려놓는 자들에게 보이는 증거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성령은 주님의 구속을 증거하십니다.
성령은 다른 어떤 것도 증거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이해와 상식 그리고 논리를 증명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구속을 증거하실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상식적인 결정을 내린 후 성령께서 증거해 주셨다고 착각하여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성령님이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증거하시는 분이라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어두운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금식을 선포하거나 작정 기도를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 기도가 자신의 주장을 이루거나 뒷받침하는 증거를 얻을 때까지 지속된다면 혼란은 제거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금식은 내가 원하는 욕망을 내려놓겠다는 것입니다. 작정은 내 뜻을 내려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루의 기도를 통해 열흘의 생생한 사역과 쓰임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상식을 여전히 구하고 있다면 성령님은 어떤 증거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상식으로 성령의 증거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역사는 의지를 내려놓을 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진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당신은 증거를 보여달라고 기도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합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챔버스는 우리들에게 성령님과 흥정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양도하고, 포기할 때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생생하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지만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욕심과 생각과 뜻을 내려놓지 않을 때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고 있음을 우리의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어떤 것 작은 부분 하나일지라도 성령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는 경험이 있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내려놓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체험케 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를 온전히 붙잡아 주실 것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유다서 1장 20절)


주님께서는 충동적인 면이나 차가운 면이 없었습니다. 결코 당황하지 않으시는 침착한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우리의 기질에 따라 신앙을 개발해 나갑니다.
충동적인 행동은 거듭나지 않은 본성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삶의 발전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항상 충동적인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이 충동을 어떻게 저지하시는지 주의하십시오.
성령의 저지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게 하며 그러면 우리는, 즉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충동적인 행동은 어린아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성장한 어른에게는 재난을 가져옵니다.
사람은 언제나 버릇이 없으며 연단을 통해 지각을 갖도록 훈련되어야 합니다.
제자훈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충동적인 담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른 땅을 걷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 무리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에서는 멀리 떨어진 채 주님을 따랐습니다. 위기를 견뎌내는데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과 자긍심만으로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기에 자랑스럽게 위기를 직면하기도 합니다.
매일 24시간을 성도로 살아가는 데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단조롭고 평범한 삶을 사는 데에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시받는 존재지만 계속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아주 예외적인 일들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깊게 뿌리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평범한 일들 속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곧 시장 거리에서 거룩해야 하고 일반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해야 합니다.

이는 5분 내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충동을 주의하라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이 디렉션 바이 인펄스라는 말입니다. 충동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뜻이죠.
오늘 묵상은 우리의 충동적인 자연적 성향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이 좀 쉽지 않은데 좀 하나하나 풀어가 보겠습니다. 다음의 한 문장은 챔버스가 말하는 요점이 들어있습니다.
'충동적인 행동은 거듭나지 않은 본성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는 말씀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연적 본성을 따라 사는 데서 기인합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들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말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은 모든 창조된 피조물에 주어진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이 있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욕망대로 살면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으로 우리 속에 있는 자연적 욕망을 다스리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충동, 즉 자연적 욕망을 어떻게 점검하실까요?
성령의 저지 영어로는 체크라고 돼 있어요. 성령의 체크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게 하며 그러면 우리는, 즉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이 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 통제받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은 양심의 가책을 통해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은 무지함을 나타냅니다. 깨달음의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라면 어떠한 가책도 없이 제 멋대로 하는 행동이 이해되지만 장성한 자에 통제를 받지 않는 행동들은 버릇이 없는 것이며 재난을 초래할 것입니다.
사도바우리 고린도 오서 7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 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근심케 하는 것이 구원의 과정임을 기억하십시오.
회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죄를 깨닫기 하실 때 찾아옵니다. 회개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근심피합니다.
죄를 깨달았으나 그것을 이길 능력이 없음 또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근심은 우리가 성령님과 친밀해지도록 만들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근심 속에서 성령을 구하는 사람에게 임하시고 봉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근심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원인이 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성령님으로 인해 찾아오는 근심과 세상적인 것으로 인해 찾아오는 염려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삶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훈련과 관계의 유지가 필요합니다. 충동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님께 많은 연단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장 20절이죠.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성령으로 인해 마음의 근심이 찾아왔다면 구원의 여정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 주제 제자의 삶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은 제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충동적인 담력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행했던 놀라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른땅에서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제자의 보호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로서의 삶은 특별한 순간에 일어나는 충동적인 일이 아니라 매 순간을 주님과 동행하는 일입니다. 다음 말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위기를 견뎌내는데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과 자긍심만으로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기에 자랑스럽게 위기를 직면하기도 합니다. 매일 24시간 을 성도로 살아가는 데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전에 챔버스가 사용했던 시금석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은 지루한 일상이라고 했던 말입니다. 특별한 순간 은혜가 충만하고 귀전으로 가슴이 뜨거운 순간에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루한 일상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정말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4명이 보이지도 주어지지도 않는 것 같은 상황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진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혹여 알아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무시당한다고 느껴진다면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묵상 중에 저는 이 부분이 가장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들 속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곧 시장 거리에서 거룩해야 하고 일반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류는 늘 특별한 상황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입니다. 일상에서 준비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특별한 상황이나 위기 상황에 어떻게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거룩한 사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예외 지적인 존재로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오늘 당신에게 찾아온 근심은 성령으로 인한 근심입니까? 세상에 의한 염려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무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욕망은 늘 우리를 충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근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인하여 근심이 찾아왔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 책망하심으로 인하여 근심이 찾아왔다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우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시고 주님 간절히 바라옵기는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찾아오는 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선포할 수 있는 사람들 오늘 하나님의 내가 내 속에 이렇게 임하였구나 간증할 수 있는 귀한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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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거룩하게 하실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을 것인가입니다. 구속에 의해 가능하게 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내 안에 행하시도록 기꺼이 허락합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거룩이 되게 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육신의 삶 가운데 나타나도록 하겠습니까? 나는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주의 하십시오. 당신은 말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실제로 거룩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하십시오. 빈손 들고 갑니다.
분명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거룩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속죄에 위대한 역사가 당신 안에 실제로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모든 것이 주께서 이루신 속죄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에 의해 내 것이 됩니다. 구원받고 거룩해진 사람으로서의 태도는 심오한 거룩을 겸손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거만한 거룩함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 거룩은 가슴을 치는 회개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와 전적 타락에 대한 깨달음에서 옵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도 내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오는 거룩입니다. 내 구원과 거룩을 위해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이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숭고한 속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절대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원인으로 두지 마십시오. 내 안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순종과 섬김과 기도이며 이는 속죄로 인해 내 안에 형성된 놀라운 거룩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찬양의 결과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10월 20일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거룩해지려면

오늘 묵상의 제목이 전체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입니까?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거룩에 달려있습니다.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단순히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자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속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역사이지만 거륵은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룩은 우리의 의지와 순종이 구속에 기초를 둘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스스로의 노력에만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첫 문장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거룩하게 하실 것인가? 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을 것인가?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의지적 노력으로만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삼을 때 시작됩니다. 오스왈트 챔버스의 주의 형상을 본 바다에 나오는 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적인 성품이 자라날수록 더욱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들의 영적 성장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다르게 이해한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 성도의 성품이 변하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그리고 세상에 물들지 않은 강력한 습관적 거룩함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된다. 거룩이 구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거룩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속하기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이 내 속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오 나는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라는 말로 거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속에서 역사할 때 그로 인해 실제로 거룩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 만세반석 열린이의 3절 가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빈손 들고 앞에 가 자라도 도와주 신발 하고 가니 나를 싫어 서 주소서 우리는 오로지 빈손으로 죽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 구속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시에스 루이스는 기도의 자리로 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빈손에 주신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도 있습니다.
양손에 짐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짐이 죄나 세상 염려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방식대로 그분을 예배하려는 조급한 시도도 때로는 짐이 되니까요? 내 경우만 하더라도 가장 단골로 기도를 방해하는 잡념은 중대한 내용이 아니라 잠시 후에 하거나 삼가야 할 일과 같은 자잘한 내용이지요 양손에 가득한 짐 죄 세상 염려 우리의 방식 잡념 등을 내려놓고 빈손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를 채우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빈손 들고 갑니다. 분명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거룩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가 기억해야 될 1줄 노트 빈손 들고 죽게 가오니 십자가의 보열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거룩하게 하소서

두 번째 주제 거륵의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해졌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챔버스는 거룩의 표징으로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거만한 거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은 가슴을 치는 회개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와 전적 타락에 대한 깨달음에서 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이 내 안에서 구원과 거륵을 완성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로마서 8장 39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거륵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변화는 이것입니다. 거륵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러한 하나됨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챔버스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원인으로 두지 마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절대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원인으로 두지 마십시오. 거룩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고 거룩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질책하셨던 위선적인 바리세인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 누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자녀되는 권세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이 원인이라면 우리는 교만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속의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면 한없이 겸손할 것입니다. 거룩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 때 순종과 섬김 기도가 뒤따라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찬양이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1줄 노트 거룩한 성도가 결코 교만하지 않는 것은 거룩이 구속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거룩함을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 안에 구속의 역사가 일어나면 거룩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마음에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갈려고 하는 귀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의 거룩함으로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착각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원합니다. 거룩함으로 우리가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인하여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시고 거룩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거룩한 우리의 모습 가운데 겸손이 있는지 감사가 있는지 찬양이 있는지를 잘 기억하고 묵상하게 하셔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조금 더 거룩해짐으로 인하여 겸손하게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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