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불명예가 되는 것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한복음 11장 7~8절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경우 예수님께 불명예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만이 주님께 불명예가 됩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대로 따르기보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 영광이 될 거야'라는 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생각이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제안이 올 때를 압니다. 주님의 제안은 매우 조용하면서도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제안에 대해 내가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가지고 내 속에서 따지면 의심과 다툼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요소들을 끌어들이면서 결국 그 제안을 밀어내는 잘못된 결론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교리에 충성합니다. 주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발걸음을 내딛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리에 충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나의 지식을 신앙의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마음을 다해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발걸음을 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무언가 분명히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마음속에서 논쟁합니까? 아무 미련 없이 기쁨으로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주님께서 뭔가를 말씀하셨는데 계속 당신이 따진다면 그것은 주님께 영예가 되는 것을 내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주님께는 불명예가 됩니다. 당신은 그분의 말씀에 충성합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신의 교리에 빠져 타협하고 있습니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 2:5)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3월 28일 주님께 불명예가 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분별
오늘 말씀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실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순종이 주님께 해가 되고, 불순종이 주님을 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올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아주 쉽게 우리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부분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고 있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길은 유대인들이 가로막고 심지어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주님의 기적에 환호하며 예수님께 나왔던 우호적인 군중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 틈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이 상황을 보고 어떻게 주님을 말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그렇게 주님을 말리고 있는 장면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제목이 원제로 보면은 이렇게 되겠어요. Isn't there some misunderstanding?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는 오늘 주님께 불명예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제목보다는 여기에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하는 이 구절에 오늘 주제에 아주 적절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제자들은 지금 주님의 길을 막고 있나요? 그들의 의도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불명예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주님께 불명예가 된다면 우리도 모두 길을 막지 않겠습니까? 오늘 챔버스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의 사역에서도 이런 경험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제대로 된 순종을 하지 못하는 것 바로 부분이죠. 챔버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경우 예수님께 불명예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번역했던 책이 하나 있는데, [성공을 디자인하라] 제목을 잘 보세요. 여기에 아주 제가 인상적인 영 예화 하나를 번역했는데 많이 쓰이는 예화가 되었더라고요.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전투함에 함장이 항해를 하면서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는데,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입니다. 그대로 가면 배가 정면으로 부딪칠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죠. 그래서 신호를 보냅니다. 앞에 있는 배, 당신의 진로를 남쪽으로 10도 돌리시오. 그러자 신속하게 저쪽에서 답변이었습니다. 당신의 진로를 북쪽으로 10도 돌리십시오. 함장은 자신의 메시지가 무시되었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며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진로를 남쪽으로 10도 돌리시오. 이 배는 굴함이오. 상대방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당신이 진로를 북쪽으로 10도 돌리시오. 여기는 등대요. 아무리 전함이라고 해도 고정되어 있는 등대를 움직이도록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실 때 명령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챔버스는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하는 일이라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불순종이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주님께 불명예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처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주님께 불순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아무리 선한 동기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일 뿐입니다.
그리고 순종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우리에게 제안하실 때 내 안에서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가지기 시작하면 의심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주 중요한 일인데 주님의 제안을 밀어내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의 이해를 기준으로 할 때입니다. 아주 황당한 것 같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기다려온 일이라 마음이 설렜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떠나기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지순례에 관한 팸플릿을 보면서 또 타고 가야 할 비행기가 전보 747 비행기라는 것 등 여러 여행 정보에 대해 세밀히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였습니다. 정말 이 여행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이 참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난밤에 고민이 눈 녹듯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탁상에 놓여있는 시계를 보니 일어난 시간이 7시 47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행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전보 747 비행기와 7시 47분에 일어난 것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겠습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님에 대한 관념 혹은 교리에 집착합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어떤 사건들을 우리들이 늘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죠. 챔버스의 글을 조금 인용합니다.
자신의 교류에 충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나의 지식을 신앙의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마음을 다해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저함은 자신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해와 분명한 지식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저함과 논쟁으로 이어지는 결론이란 결코 주님을 명예롭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저한다는 의미는 결국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을 자신이 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 때는 미련 없이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 5절에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을 때, 그 잔치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주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많이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주님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믿음이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다해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품고 살아갈 묵상질문
오늘 당신의 주저함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시 나의 이해만을 바라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요?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이해를 믿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어떤 싸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셔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순종하기 힘든 것이 우리의 연약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주님, 순종할 수 있는 단순한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 말씀이 분명하다면 나의 이해가 앞서지 않도록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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