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지고 닳아질 수 있습니까?
만일 너희 믿음의 재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립보서 2장 17절
당신은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해 믿음의 재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까? 당신의 생명의 피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한 전제(전제)로 부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을 다 드릴 수 없어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내가 어떤 희생을 할 수 있는지 내가 결정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잘했다'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영웅심에 빠져 외로운 길을 걷는 것과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발떨이개'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남에게 천시받고 낮아지는 비결'을 가르치신다면 당신은 가르침대로 바쳐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물동이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처럼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 소망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별 볼 일 없는 사람, 당신의 섬김마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섬김을 받지 않고 오직 섬기기 위해 당신의 삶을 바치며 삶이 다 닳아지기를 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성도들은 성도이기를 원하면서도 천하고 궂은일들은 싫어합니다. 자신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65일 매일 만나 오늘은 2월 5일 낮아지고 닳아질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한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진정 낮아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해한 대로 사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전제라고 하는 말은 부음 혹은 쏟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바쳐 충성하셨다' 이때도 쓰여질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번제나 소제,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포도주와 독주를 제물로 드렸다.' 이때도 쓰여질 수 있는 말입니다.
전제로 '나를 드린다'라고 라는 뜻은 '나를 부어 쏟아낸다' 그런 의미죠 어떤 것들을 부어내고 쏟아내면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을 통해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반만 아니면 10분의 1만 쏟아내려고 하는 그런 얕은 신앙인의 자세를 꼬집고 있습니다. '전제로 나를 드린다' 이러한 것은 완전히 버려지는 겸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의 전기 <전능자의 그늘>에 보면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그가 전제로 드려짐을 생각하며 썼던 일기가 나와 있습니다. 평소에 그런 그의 생각이 그의 삶을 그렇게 순조자로 이끌어 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이 일기를 보았습니다. 잠깐 소개하죠.
아버지, 제 생명을 취하소서. 주님의 뜻이 지라면 제 피를 취하소서. 주님의 삼키는 불로 제 피를 태우소서. 제 것이 아니기에 아끼지 않겠습니다. 주님 가지소서. 다 가지소서. 제 생명을 세상을 위한 희생으로 부으소서. 피는 주님의 제단 앞에 흐를 때만 같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의 원제는 원문에 보면 Are you ready to be offer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드려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문법적으로 이 부분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발적인 희생 챔버스가 계속 강조하는 것이죠. 그러나 언제든 나를 비워내고 쏟아질 쏟아낼 준비가 되어있는 완료된 상태 완전 수동태 상태 이것을 오늘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오늘 묵상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도 바울의 이야기 바로 전에 사도바울은 자기를 비우는 케노시스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죠. 주님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 역시 믿음의 지체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큰 기쁨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낮아지는 섬김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챔버스의 글을 인용합니다.
당신의 생명의 피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 전제로 부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을 다 드릴 수 없어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을 원치 않아요. 내가 어떤 희생을 할 수 있는지 내가 결정하기를 원합니다.
온전히 재단에 피를 쏟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직도 내 자아가 살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정 낮아진다는 것은 섬김의 결정도 하나님께 주도권을 양도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드러나든지, 완전히 낮아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챔버스의 글을 조금 더 인용하죠.
영웅심에 빠져 외로운 길을 걷는 것과,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발 떨이개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남에게 천시받고 낮아지는 비결을 가르치신다면 당신은 가르침대로 받쳐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기에서 챔버스가 영웅심에 빠져 외로운 길을 걷는 것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사는 신발떨이개 이렇게 또 대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영웅심에 빠져 걷는 외로운 길은 무슨 의미일까요? 챔버스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삶과 대비에서 설명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놓으신 길을 가는 것이 때로 외로운 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집 현관 앞에 놓인 신발 떨이개가 되는 것 신발떨이개가 뭘까요? 도어 매트입니다. 사람들이 들고 날 때 담는 것이죠. 얼마나 하찮은 물건입니까? 우리가 도어 매트가 된다면 스스로 겸손할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충분히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웅심에 빠져 걷는 외로운 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낮아졌다는 자반심을 가지고 뻐기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낮아졌는데 하나는 진짜 낮아진 것이고. 또 하나는 낮아짐으로 인하여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죠. 분명히 낮은 곳에 있는데, 교만으로 가득 찬 모습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이 정해 놓으신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결정한 일을 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아무리 겸손한 자리에 있어도 성령님과 동행할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다투었던 제자들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길은 십자가의 길인데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고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걷고 있으나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위대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끊임없이 겸손을 강조했고, 겸손 때문에 고민을 한 흔적들이 많습니다. 토마스 아캠피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오직 겸손만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죠. 오스발드 챔버스 역시 겸손만이 주님께 순종하는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영성가인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가 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하나님이 전부가 되심을 알고 그분이 전부가 되시도록 길을 내어드릴 때 얻게 됩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처럼 중요하지 않게 여겨져도 아무도 섬김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챔버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섬김을 받지 않고 오직 섬기기 위해 당신의 삶을 바치며 그 삶이 다 닳아지기를 원할 수 있습니까?
가만히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우리들 스스로 성도라고 말을 하면서 천하고 궂은 일은 섬기기 싫어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닌가요? 심지어 이렇게 궂은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품격에 맞춰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진정 낮아진다는 것은 타인을 섬길 때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그 자리로 보내신 이가 누구신지, 그 자리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가 겸손의 유무를 결정합니다.
오늘 이런 질문을 가지고 하루를 지나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진정 낮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자리에 있게 하신 이는 누구신가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도전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낮아지고 닳아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은 곳에 두시고자 할 때 기꺼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 때때로 우리들 속에 교만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들이 낮아졌다고 자랑하는 우리의 교만을 봅니다. 하나님, 이런 위선적인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몰아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두게 하시는 그 자리에서, 겸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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