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하시는 부르심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당신의 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할까 주의하십시오. 구원을 얻은 모든 주의 백성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은 복음선포의 부르심과 다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은 단지 복음선포를 위한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심적 부담에 대해 말합니다. 위의 내용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만나려는 영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주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어떤 제자 훈련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 훈련은 선택 사항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막 8:34)" 위의 바울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는 자들과 관련됩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할 것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를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주님의 찢겨진 살과 쏟으신 피를 의미함)로 만드십니다.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건성으로 듣게 되면 사람은 주의 종으로서의 이름에 합당한 고통을 받기 시작합니다. 모든 야망은 꺾이고 인생의 욕망은 잠들게 되며 외적인 자랑들은 철저하게 제거되고 사그러듭니다. 오직 한 가지만 남게 되는데 그것은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이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데도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발을 옮기려는 자들에게 얼마나 불행한 일들이 발생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의 복음의 종으로 부르시는지 확인하십시오. 주께서 당신을 부르실 때 그 부름을 방해하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365일 매일 만나 오늘은 2월 2일. 강권하시는 부르심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오늘 역시 두 개의 대지를 가지고 나누어 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한 간증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심적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 부담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범죄 영화나 법정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의 증인들이 법정에 서서 증언을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이죠. 누구의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굉장히 중요한 증거를 알고 있는데, 자신에게 들어올 불이익 때문에 주저하는 일들 같은 거 말이죠. 누군가의 생명에 관계된 그런 증언, 증인이라면 부담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느꼈던 부담감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부담에 대하여 챔버스는 구별이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읽는 챔버스의 묵상글을 가지고는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영어 원문을 보면 단어의 미묘한 차이가 그 구별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증거인 간증 테스트 파이라고 하는 말과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전하는 보금 전함 프리치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챔버스는 테스트 파이 간증하는 것과 프리치 복음을 전하는 선류와는 다른 것이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고 싶은 것 같아요. 다른 말로 한다면, 자원하는 부르심이 있고 강권하는 부르심이 있다. 이 차이로 챔버스는 또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구원하시는 부르심에 부담을 갖겠습니까?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죠. 챔버스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주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어떤 제자 훈련을 내걸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 훈련은 선택 사항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과 제자가 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제자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지 모른다고 여길 만큼 복음 전하는 일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세상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겼다 이런 표현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죠. 혹시 우리가 귀를 막고 있는 이유는 사도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세상 것들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에서 받을 영광, 사람의 칭찬과 인정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입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엄 캐리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본래 구두 수선공으로 그리고 독학을 했던 사람이랍니다. 그는 뛰어난 언어의 능력이 있는데요. 독학으로 여러 나라의 언어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 친척 동생이 캐리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유명한 언어학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화 중에 교수는 캐리에게 특별한 언어의 재능이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이 이 학교에 들어온다면 이 나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오. 그리고 이 나라의 여왕께서도 당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캐리는 이 엄청난 제안에 대하여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을 말씀하셨는데 제게는 이미 저의 전 생애를 건 한 나라가 있습니다.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여왕보다 더 높으신 분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분을 향한 저의 충성은 변할 수 없습니다." 캐리는 쉽게 이 교수의 제안을 거절하고 인도의 선교사로 떠나게 됩니다. 그가 세상의 명예를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호칭을 얻었고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못하니 부르심이 귀에 들리지 않고 공허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인정의 욕구에서 벗어나 참된 부르심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챔버스가 더눈에서 영적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을 보낼 때의 이야기입니다. 기도 동맹의 선교 집회 기간 중 한 작은 기도 모임에서 누가복음 11장 13절 말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였습니다. 당시 그의 상태를 그의 일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천국이나 천사들을 보지 못했고 내 안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전처럼 똑같이 내 심령은 메말라 있었고, 공허했다. 하나님을 깨닫는 능력도 없었고 성령의 증거도 없었다.
바로 이런 영적으로 척박한 상태 가운데서 챔버스는 집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놀랍게도 말씀을 전하고 난 후에 40명의 영원히 제단으로 나와 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서 영적 스승이었던 맥그리거에게 달려가 이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계속되는 그의 일기의 내용입니다.
그는(맥그리거시) "자네는 자네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의 은사를 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가? '주께서 네게 능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지. 지금 발생한 일은 위로부터 내려온 능력 때문이네"라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내 안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다. 나는 스스로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을 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는 자 봐라 나의 모든 것을 재단 앞에 드렸더니, 내가 이런 능력을 얻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진정한 부르심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 종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갈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챔버스가 경험했던 것처럼 육신의 자랑거리를 버리지 못하는 한 주님께 순종하는 종의 모습을 가지지 못합니다. 종되지 못하면 자꾸 하나님과 협상하려고 합니다. 이만큼 내가 내놓았으니 이만큼 인정받아야 되겠다는 생각들 말입니다. 또한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우리의 방식을 고집하게 됩니다. 택함 받은 종이 되었다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챔버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를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주님의 찢겨진 살과 쏟으신 피를 의미함)로 만드십니다.
앞으로 우리가 챔버스의 글을 묵상하면서 끊임없이 등장하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입니다.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은 모든 야망은 꺾이고 인생의 욕망은 잠들게 되며 외적인 자랑들은 철저하게 제거되고 사그라지는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부르심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이 부르심을 건성으로 듣는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상태를 '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챔버스의 글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데도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발을 옮기려는 자들에게 얼마나 불행한 일들이 발생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위의 복음의 종으로 부르시는지 확인하십시오. 주께서 당신을 부르실 때 부름을 방해하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것은 기꺼이 찢겨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가 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이런 묵상 질문으로 하루를 살아가 보면 어떨까요?
부르심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당신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참버스의 글을 통해 찢어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가 되라는 말씀이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기꺼이 부르심 앞에서 찢겨진 빵이 되고 부어진 포도주가 될 수 없을까요?
언제까지 우리는 우리의 의를 드러내며, 우리의 능력을 나타내며, 내가 이만큼 능력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로 그렇게 살아갈까요? 오늘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명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화가 임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히 쓰임받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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