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부르심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이사야 6장 8절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내용 곧 부르시는 분의 속성을 잊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는 바다와 산과 거대한 해빙의 부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름은 언제나 소수의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부름은 부르는 자의 속성이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부르는 분과 같은 속성이 있을 때 그 부름이 들립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의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분의 완전하신 섭리 가운데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우리만 인식할 수 있는 음성이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건 속은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과 그 음성에 관해 자문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에게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속성에 메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뭘 좋아하는지, 개인적 성격은 어떠한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습니다. 만일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의 성격에 맞는 것만을 고려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들어가면 그때 나는 이사야가 있었던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사야의 영혼은 엄청난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맞추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놀란 영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음성만을 들을 귀가 있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영역 속에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근본적인 깊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16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부르심. 제목부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도 우리들에게 주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역시 두 가지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를 부르시는 분
이틀 전 나누었던 묵상을 통해 우리는 챔버스의 소명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보았습니다. 만일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뒤로 가서 한번 듣고 오셔도 좋을 것 같애요. 독특한 관점이 무엇인가? 이사야의 부르심은 그를 향한 특정한 부르심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사야가 들을 수 있었다. 기억이 나시나요?
챔버스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분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이틀 전에는 어떻게 부르시는가였다면, 오늘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어떤 분인가? 그런 이야기죠. 다시 한 번 말하면 누구에게나 들릴 수 있는 말씀이 소수에게만 들린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우리들 속에 있는 우리의 속성이 같을 때 부르심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챔버스의 말을 조금 인용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그분의 완전하신 섭리 가운데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우리만 인식할 수 있는 음성이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건 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과 그 음성에 관해 자문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에게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사야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사야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죠. 이런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제가 오늘날 우리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이런 것이 될 것 같아요. 주파수라고 하는 거죠. 이 주파수는 뭔가요? 전파에는 파장이 아주 광범위하게 있다고 하죠. 그래서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 파장별로 A M, FM 이렇게 나누기도 하고, 또 그것을 대역별로 나누어서 방송의 주파수를 만드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라디오를 들을 때 주파수를 맞추었던, 옛날에는 이렇게 다이아를 잘 맞추었던 그런 기억이 있을 겁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주파수를 맞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우리들이 아무리 좋은 라디오를 가지고 있어도 절대로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는 없는 것이죠. 이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들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하나님은 어떤 주파수를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실까요? 아니 우리가 맞추어야 하는 하나님의 영역은 어떤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부르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되고, 우리 속에 그분이 거하실 때 그분의 소리가 우리들 속에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애착 관계라는 실험이 있답니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되는 엄마들 아기들을 한 방에는 엄마들만 모아놓고, 한 방에는 아기들만 모아놓고 지내는 거예요. 처음에는 한밤중에 아이가 울면 한 아이가 울면 모든 엄마들이 다 깬답니다. 혹시 내 아이가 우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한 아이가 울 때 유독 그 아이의 엄마만 눈을 뜬다고 합니다. 이미 아이와 엄마 사이에 울음소리라고 하는 이 관계를 통해서 애착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죠.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부르심이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우리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지만,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 속에 애착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죠.
챔버스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오류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의 음성을 자꾸 다른 누군가를 통해 들으려고 하는 시도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나를 조정하도록 만들어 놓는 내버려 두는 그런 시도들이죠. 부르심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려고 우리들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면 알수록 우리 속에서 부르심이 명확해집니다.
2. 부르심을 들으려면
아주 흥미롭고 진지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기질과 우리의 취향을 고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성품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질과 속성 앞에 우리가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챔버스에게 있어서도 이 부르심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철저한 자기 항복을 경험한 거죠. 1901년 챔버스는 그의 삶에 하얀 장례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지인들에게 드러내 보일 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해요. 내 모든 죄가 드러나면 어떡하나 그런데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되죠.
내가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 다른 사람이 알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현재의 상태에서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다해도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의 고상함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우리의 기질에 맞게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챔버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음성만을 들을 귀가 있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영역 속에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근본적인 깊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챔버스의 묵상에 흐르는 아주 중요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종이죠. 순종 없는 따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힘들겠지만, 계속 순종하며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순종의 길입니다. 어제의 묵상과 연결해 본다면 끊임없이 항복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따르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하나님의 부르심을 진정 듣기를 원한다면, 나 자신이 부르심을 듣기에 합당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를 순종의 준비가 되어 있나요?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짧은 기도로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저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은 당신분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일을 제게 행하소서. 제게 주기도 하시고 가져가기도 하소서. 제 뜻을 당신 뜻에 맞춰주소서. 겸손하고 완전한 순종과 거룩한 확신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섭리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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