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근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송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장 7절


하나님의 사랑을 부추기는 가르침을 주의하십시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니 당연히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감상적인 생각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유일한 기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엄청난 비참함 때문입니다. 이외에 다른 것을 근거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은혜 가운데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새롭게 세우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용서는 갈보리의 고통의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이에 우리의 단순한 믿음과 함께 죄사함, 성령의 선물, 우리의 성화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치르신 어마어마한 대가를 우리는 종종 잊곤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면서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대가를 치르셔야 했습니다. 속죄를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하나님은 속죄 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만일 속죄 없이 죄를 용서하시면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속성에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속죄에 의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영역에서만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죄사함의 기적과 비교할 때 성화의 체험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성화는 단지 우리의 죄사함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놀랍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코 이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치르신 모든 대가를 깨닫기만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며 사랑에 의해 강권될 것입니다.


은혜는 값진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묵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용서에 대한 묵상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의 죄와 악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죄를 용서하셨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인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일은 이 세상에 죄를 없앤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시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눈감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는 말이 너무 지나친 말로 들리시나요?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이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왜 이 부분을 이렇게 심각하게 다루고 있을까요? 그냥 쉽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면 될 일을 말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은혜 가운데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새롭게 세우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챔버스의 묵상 가운데서 끊임없이 대속이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하는 말과 십자가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치르신 어마어마한 대가로 말미암아 용서가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용서는 갈보리의 엄청난 고통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용서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우리의 용서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용서란 사랑이라는 달콤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있는 말이죠. 우리가 용서를 귀하게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이 성화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용서는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치열한 희생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얼마나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송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속죄 없이는 용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없이 용서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모순되는 일입니다.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이 꼭 필요한 일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동반하는 일이었습니다. 챔버스는 속죄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사함의 기적과 비교할 때 성화의 체험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성화는 단지 우리의 죄사함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놀랍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이 놀라운 속죄의 은총을 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속죄의 사건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값지고 아픈 것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든 교회가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값비싸게 여길 때 치열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본회퍼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값비싼 이유는 하나님이 치르실 수 있는 가장 귀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값비싼 대가는 결코 우리에게 값싼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묵상52]에 나오는 글을 제가 소개합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요,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죄를 나무라고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은혜가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기 때문이요, 은혜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셨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 우리에게는 값싼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귀하게 간직해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은혜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픔과 희생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고 사랑만을 강조하면 싸구려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때 값진 은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구속의 은혜가 값지게 느껴질수록 우리는 더욱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우리의 어떤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던 것인지, 그 사랑과 은혜가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사무치게 느껴질 때 그 은혜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값비싼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은혜를 아는 자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거룩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그 값비싼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의 삶에서 한 가지를 묵상하며 지나가길 원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의 어떤 죄 때문에 하나님 그 비싼 대가를 치르셔야 했는지,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고쳐지고 우리의 인격이 고쳐지고 우리의 삶이 한 걸음 더 성화로 나아가는 귀한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성령에 의해 책망받을 때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8절


죄에 대한 성령의 책망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는 잘못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한 죄의 책망은 땅 위의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단 한 가지 관계만을 고려하게 하는데,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에 의해 죄에 대한 책망을 받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코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을 양심의 깊은 곳에서 알게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강한 정의감을 갖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가로 인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큰 기적은 주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며, 그 용서는 주님의 속성에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죄에 대해 책망받는다면 우리는 다시는 절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갈보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곳이 아닌 오직 십자가를 통해 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공인은 만족되었습니다.
용서가 의미하는 것은 단지 내가 지옥에서 구원받고 천국의 특권을 얻은 것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이러한 차원에서 용서를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내가 죄 사함을 받아 다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속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새로운 성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넣어주심으로써 거룩하지 못한 나를 거룩하신 주님의 기준에 맞게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

오늘 챔버스가 다루고 있는 죄의 문제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깨닫게 되는 죄는 무엇이 다를까요?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한 죄의 책망은 땅 위에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단 한 가지 관계만을 고려하게 되는데,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보면, 성령의 책망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후회와 진정한 회개의 차이를 말하며 성령님의 책망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생각하며 겸손을 유지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조금 소개합니다.
성령님이 죄를 책망하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반면,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죄의 가책만을 원한다. 가인의 '후회 체험'이 전형적인 것으로서 아마도 그보다 덜한 죄악을 범했어도 그는 후회를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 실제 살인자는 적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잠정적으로 살인자들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길 때 늘 겸손을 유지하는 비결은 만일 하나님의 은혜 없었다면 나는 현실적으로 어떠한 존재였을지를 성령님에 의해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무섭게 책망하실 때 찾아오는 것은 절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무서운 죄를 보게 하신다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까요? 챔버스는 아주 흥미롭게 이 부분을 묘사하고 있는데,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강한 정의감을 갖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깊숙이 무서운 죄성을 깨닫게 하실 때 두려움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신다고 해도 우리 속에 있는 정의감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무섭게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 단순히 죄를 깨닫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감정으로 용서하는 것과 성령의 책망을 통해 용서의 경험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책 [구원의 은혜]에 보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면,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 우리가 범죄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죄를 없앨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빛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탕감해 주실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은 일을 기뻐하신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우리가 그분에게 범한 죄를 지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챔버스의 묵상글을 통해 배우는 아주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구속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자 요 부분 다시 한번 들어보세요. 우리가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구속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골고다 십자가의 희생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갈보리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용서함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중요한 의미는 단순히 구원을 받고 천국의 특권을 누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는 내가 죄사함을 받아 다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갖는 것은 기적입니다. 개별적 인간이 주님의 성품을 갖는 것은 기적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에 맞게 변화되는 것은 기적입니다.
오래전 밀양이라는 영화 때문에 크리천들의 마음이 많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아들을 죽인 유괴범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한 주인공이 참 어렵게 형무소로 범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살인자가 너무나 평안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는 평안합니다." 말을 듣고 주인공은 절규합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너를 용서해 그렇게 절규하며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은 아직도 아들을 잃은 고통으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범인이, 살인자가 그렇게 편안한 모습을 바라보며 주인공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용서받는 것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용서받을 때 사실은 죄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회개하는 것이 바로 용서와 회개의 본질입니다.
진정한 용서로 들어가기 위해 회개할 때 얼마나 애통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힘들어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으로 용서받은 우리가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때 아픔이 클수록 진정한 용서를 경험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용서를 경험한 우리는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진정으로 애통한 경험이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고, 그리고 십자가로 인해 우리들이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함은 그렇게 낭만적으로 쉽게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내 죄가 용서받을 때 큰 아픔이 내 안에 들어와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과정을 지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임을 우리가 깨닫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안에서도 애통함이 시작되게 하여 주옵소서. 죄의 용서의 감격이 내 안에서도 깊숙히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축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진정한 자유함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장 36절


개인적인 교만이 남아 있으면 교만은 언제나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한편 인격적 본성은 절대로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 단지 계속 무어든 흡수합니다. 인격적 속성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어진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엄청난 역량을 가질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죄와 우리의 개별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개별성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입니다. 즉,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하나님께 드려 희생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삶이 순종에 의해 영적인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삶의 진보에 있어서 우리의 자연적인 개별성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자연적인 삶을 간섭합니다. 이때 우리는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대항하지 말고 주님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삶과 관련해 우리를 훈련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이론과 생각을 사로잡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오 주님, 나의 생각은 언제나 방황합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방황하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별성이라는 독재자의 음성을 듣지 말고 인격적 본성을 따르는 자유함을 얻으십시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아들'을 '구세주'로 대치하지 마십시오. 구세주는 당신을 죄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아들에 의해' 자유케 되는 자유를 누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자연적 개별성은 다 부서지고 인격적 본성이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그의 인격적 본성이 주님의 것과 합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근본에 있어서 자유 함이오 내면으로부터의 자유함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자유하게 하는 능력을 입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능력을 소유하려고 능력 자체만을 고집합니다.


개별성과 인격성

아마 오늘부터 시작해서 거의 1주일 동안 굉장히 좀 어려운 이야기들 어려운 개념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 것 같습니다. 한 주간을 여러분들이 이렇게 잘 배우고 넘어갔으면 좋겠고 어렵지만 또 꼭 필요한 내용들이니까. 잘 참고 견디고 또 한 주간을 넘어가면 조금 쉬워질 것 같습니다.
오늘 묵상에서는 두 가지 단어의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별성이라고 하는 말인데요. 영어의 individuality을 개별성이라 이렇게 번역을 하고, 또 인격성이라고 하는 말인데 personality라고 하는 말을 인격성이라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이 개별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인격성과 반대되는 개념 본래적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인격성 이렇게 구별이 될 것 같습니다. 인격성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우리 속에 새로운 본성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장에서 이 둘의 차이를 챔버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교만이 남아있으면 교만은 언제나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한편, 인격적 본성은 절대로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계속 뭐든 흡수합니다.
이러한 본성과 자유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사실 오늘 챔버스는 주로 이 자유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참 자유를 얻는 방법은 우리 인간의 개별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죄와 개별성은 이렇게 무한한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타락한 본성과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개별성에서 인격성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죠. 이러한 자유로움과 능력은 순종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어제 묵상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순종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될 때,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을 개별성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입니다. 즉 우리의 자연적인 삶을 하나님께 드려 희생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그 삶이 순종에 의해 영적인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는 말씀 안에서 우리의 개별성이 완전히 죽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순종의 희생제물이 됩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서 어떻게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더 이상 제한적인 인간의 개별성이 우리를 얽매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연적 개별성은 다 부서지고 인격적 본성이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주님과 연합하면 나는 할 수 없어요라는 말로 주님께 대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돕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제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 부분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삶과 관련해 우리를 훈련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이론과 생각을 사로잡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영적으로 훈련시키신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우리 몫이라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인도하지 않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려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이론을 한 번에 고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복종케하시는 분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순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시험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결단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 불리는 성경입니다. 사도바울은 매일 죽는 삶을 통해 진정한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챔버스가 말하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자유함에 대한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한 A.W. 토저가 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곳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좀 읽으면 이 아이가 좀 좋을 것 같습니다.
암세포는 인체의 세포 중 가장 자유로운 세포이지만 계속 성장하면 유기체를 죽일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사회의 구성원이 제한된 자유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각 구성원은 전체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축소해야 하는데 이 법은 온 피조 세계에 적용되며 하나님의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너무 많은 자유의 위험성이 그리스도인을 늘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롭지만 그의 자유 때문에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다. 사실 그는 죄에 속박해서 자유롭고 용서받은 악한 행위들의 도덕적 결과들에서 자유롭고 하나님의 불쾌하게 여기심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은혜가 그가 갇혀있는 감옥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제 그는 옛날에 바라바처럼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다. 다른 분이 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다. 이용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보유를 통해 주어진 자유를 육신의 정욕을 위해 악용하는 것이다.(신약 성경은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다른 하나는 낙타처럼 무릎을 굽혀 자발적으로 짐을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짐을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의 동료 인간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기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 사도바울처럼 빚진 자로서 빛을 담는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의 능력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온전히 주님과 하나 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매일 죽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함을 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의 자유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매일 죽을 수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자유로 매일 죽어야 하는 옛 습성,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죄는 무엇인지 묵상하게 하여 주옵시고 사도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매일 죽는다는 고백 가운데서 그가 매일 주님과 함께 사는 생명과 부활을 경험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에서 내가 죽음으로 내가 사는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에게 큰 복을 주고
창세기 22장 16절~ 19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본성을 접할 수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실체를 이해합니다. "나의 목표는 하나님 그분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랑하는 주님, 어떠한 길을 갈지라도."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 어떤 길을 갈지라도" 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하시는 길에서 자신의 선택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에 말씀하신다면 그분께 어떠한 질문을 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즉각적인 순종만이 유일한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실 때 나는 단순히 갑니다.
주님이 "가자"하시면 나는 가고,  "이 문제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시면 나는 신뢰합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게 계시하실 때 계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나의 인격입니다.
"당신의 길이 내게 거칠게 보이는 것은 내가 거칠기 때문이라네" 순종의 훈련에 의해 아브라함이 있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으며 거기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볼 때까지 나는 실제로 참 하나님을 안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온 세상에, 나의 하나님,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우리가 순종에 의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할 때까지는 우리에게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365일 성경 안에서 무언가를 읽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 갑자기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깨닫게 되고 당장 하나님의 속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그런,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고후 1:20) 우리의 "예"는 순종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의 순종을 통해 "아멘"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답할 때,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영원한 목표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챔버스가 지금까지 강조해 왔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순종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묵상의 내용입니다.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은 영원한 목표(The eternal goa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신앙인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순종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죠. 캔버스는 말합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 어떤 길을 갈지라도 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하시는 길에서 자신의 선택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본의 제목이 이 글을 잘 설명해 주고 있죠. 주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순종을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종은 우리가 선택할 여지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즉각적인 순종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11월 11일 묵상의 내용,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던 최고의 등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부분이 궁금하시면 11월 11일 묵상을 한 번 듣고 다시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산으로 갔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죠. 챔버스는 이 순간을 가리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때, 즉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의 삶에도 진정한 목표가 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챔버스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에 말씀하신다면 그분께 어떠한 질문을 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좀 생각하면서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에 말씀하신다면 그분께 어떠한 질문을 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자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순종의 지점이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하실 때 올 수 있고, 함께 가자고 할 때 갈 수 있는 단계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던 순종은 수십 년 믿음의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즉 순종의 훈련을 통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순종의 훈련을 해야 할까요? 순종은 단순하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게 되고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우리가 순종에 의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할 때까지는 우리에게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365일 성경 안에서 뭔가를 읽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약속해 주시는 분의 성품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그 약속이 무슨 유익을 줄 수 있을까요? 신뢰가 가지 않는 약속에 어떻게 즉각적 법으로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그런 소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본성을 아는 단계까지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고민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미하고 계시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해하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순종해야 이해가 됩니다.
제가 주님은 나의 최고봉 묵상에서 몇 번 인용했던 어거스틴의 고백이죠. 나는 앎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고린도 의서 1장 20절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목표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완전한 순종]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복을 베풀어 주시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을 받으려면 완전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차 탁자를 대할 때마다 거기에서 완전한 순종을 봅니다. 왜 차를 찻잔에 붙습니까? 찻잔이 비어 있고 차를 받기 위해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찻잔에 잉크나 식초 혹은 포도주를 부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이 찻잔에 차를 붓겠습니까? 여러분이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채우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복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하실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고 비록 의지가 흔들리긴 하지만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제가 주님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나와 내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 영혼 주님의 은혜로 죽게 드리는 것은 완전한 순종입니다. "하고 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읍시다
자 챔버스의 글 중에 나오는
우리 삶 속에서의 순종을 통해 아멘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답할 때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순종이란 마치 비어있는 찻잔과 같다고 말합니다. 찻잔이 깨끗하게 비어있는 상태라야 좋은 차를 채울 수 있듯이 우리도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복으로 받을 순종과 약속의 관계는 명확합니다. 예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멘으로 대답하면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이러한 순종의 단계로 나아가는 영적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에 예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 알 수 있습니까?
약속을 담기 위해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을 비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영원한 최종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완전한 순종, 즉각적인 순종,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주저함 없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믿음,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들에게 영적 훈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최고의 등정,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리아산으로 가는 여정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그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때에 그의 최고의 등정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도 주님과 동행하며 최고의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들에게 펼쳐지는 모든 일들이 영적 훈련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어제보다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성장하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하나님의 능력만 드러내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


성육신의 위대한 기적은 평범한 유년 시절로 이어집니다. 변화산 상의 위대한 기적은 귀신 들린 골짜기에서 사라집니다. 부활의 영광은 해변에서의 아침식사로 이어집니다. 이는 절정의 반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사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웅심을 느끼는 것을 영웅이 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보는 사람도 없고 조명도 없으며 아무도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는 때 매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지내는 것은 위기를 웅장하게 견디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후광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 기도에 사람인지  "그 여자분은 정말로 경건한 분이셔"라고 말해주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주 예수님께 옳게 헌신되어 있다면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알아볼 수 없는 최상의 높이에 오른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 언제나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일을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안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가장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만드시고 전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것으로 만드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성도의 삶의 평가는 성공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의 삶에서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사역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삼으려고 하겠지만, 진정한 목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생명이 드러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들입니다.


인간적인 요소 제거하기

오늘 묵상은 챔버스가 그동안 강조해 왔던 내용들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육신의 위대한 기적은 평범한 유년 시절로 이어집니다. 변화산 상의 위대한 기적은 귀신 들린 골짜기에서 사라집니다. 부활의 영광은 해변에서의 아침 식사로 이어집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의 일상으로 이어짐을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가 나타나는 곳은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동안 챔버스는 수없이 우리 신앙의 오류를 지적해 왔습니다.
신앙인들의 잘못된 영웅심은 놀라운 경험을 사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진짜 영웅이 되는 것과 영웅심을 느끼는 것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영웅심이란 누구나 다 알아주는 대단한 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을 꿈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영웅이 되는 것은
보는 사람이 없고 조명도 없으며 아무도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을 때 매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영웅심이란 모든 사람에게서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오로지 성숙한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만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생긴 소망을 교인들과 여러 차례 설교 시간에 나누었습니다. 나도 주님처럼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어야겠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러한 소망을 나누는 것조차 참 미성숙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된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안에 아직도 마음속에 주님의 영광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의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결심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조차 전적으로 성령님께 양도해야 합니다.
며칠 전 말씀에서 챔버스는 이것을 영적 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훈련이란 나의 의지와 나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성령님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는 위대한 일을 위해 부르심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나 능력이 아님을 챔버스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가장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만드시고 또한 전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것으로 만드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계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만드시는 분이 주님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오스왈드 챔버스의 기독교 진리에 나오는 글입니다.
주님은 극히 평범하고 천한 것들을 하셔서 고결하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평범한 삶을 고결하게 승화시키십니다. 복음의 능력은 가장 평범한 일상에서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비천한 것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소박한 것이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먹고 마시기 걷기 등은 일상의 소박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일들을 하며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러한 비천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당신이 성도라면 하찮은 일을 통해 고결한 성품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작은 자임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면, 성화의 역사에서 한 걸음을 전진했으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삶은 성공이 목표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의 진정한 목표는 성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 안에서 열심을 가진 사역자들이 다투는 모습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열심이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다투는 핵심 이유는 자신의 의를 증명하기 위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가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불분명한 죄로 사역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근본적인 이유 역시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한데, 그  관계가 사라지니 사람들의 평가가 제일 우선순위가 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증명되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 인간관계입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각 지체에게 그가 있어야 할 자리가 주어집니다. 자리는 가장 성공적으로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가장 잘 섬길 수 있는 바로 자리입니다.
이 말은 유명한 디트리히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챔버스가 오늘 묵상에서 진정한 성도의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성도의 삶의 평가는 성공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간의 삶에서의 신실함입니다. 우리는 사역에서의 성동을 목표로 삼으려고 하겠지만, 진정한 목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작은 자임을 인식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자리에 있을 때 성화의 진보가 일어납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지름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누구도 당신의 의를 알아주지 않을 때 상처받지 않고 묵묵히 견디며 일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의 사역 한가운데서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만이 드러나도록 그렇게 살 수 없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늘 우리의 의가 드러나기를 원했고 우리의 의가 증명되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나고 무엇을 주장하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을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도전 , 그 도전을 안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사여 우리의 구체적인 인생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기꺼이 죽어질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성숙한 성도의 삶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21장 21절~ 22절


우리가 배워야 하는 어려운 교훈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교훈을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섣부른 도움이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즉 섣부른 도움이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당신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고통을 받아서는 안 돼 내가 사람이 고통받지 않도록 도와야겠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허락된 일을 막으려고 당신의 손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만일 당신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다면 절대로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인재 가운데로 나아가 영적 침체의 이유를 발견하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당신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기 때문에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한을 할 권리가 없으면서도 제한했고 충고할 권리가 없으면서도 충고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충고를 해야 할 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을 직접 깨닫게 하실 때입니다. 그때 성령은 당신을 통해 사람을 충고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할 일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분별의 지혜가 당신에게 임해서 당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세계의 한계 내에서 살아갑니다. 의식적으로 섬기고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성숙한 것이며 아직 실제의 삶이 아닙니다. 성숙한 삶은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어린아이 같은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면 그분께 쓰임받고 있다는 의식마저 들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로 쓰임받고 있다고 '의식'한다면, 아직 도달해야 할 단계가 많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계에 도달하면 자신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한 모든 의식이 사라집니다. 성도는 의식적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됨

오늘 묵상의 주제는 성숙한 성도의 삶입니다. 성숙한 삶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요한복음 21장 21절과 22절 본문을 오늘 챔버스가 선택하고 있습니다.
원문 제목은 본문에 '내게 무슨 상관이냐' 'What is that to thee?' 라는 말씀에서 따왔습니다. 베드로의 미성숙한 물음이었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이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숙한 성도의 삶은 다른 이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온전히 주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입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베드로의 간섭이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간섭은 때때로 우리를 영적 침체로 이끌어 갑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다르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 돕는다고 말하지만 섣부른 간섭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할 때도 있습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다면 절대로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 영적 침체의 이유를 발견하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당신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기 때문에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영적으로 침체되었을 때는 하나님과 다른 길을 가고 있을 때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양도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섣부른 충고는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흥미로운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기 원한다면,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제가 어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죠 나머지 부분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A.W. 토저에 신앙의 기초를 세우라는 곳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설교에서 이런 보석 한 개를 발견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의 말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매우 귀중한 문장이었다. 대개 10명 가운데 아홉은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조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특히 종교와 도덕 분야에 대한 조언을 무척 자신 있어한다. 그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보통 사람은 이 분야에 대해 지혜롭게 말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언은 오히려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귀 기울이지 않는 자는 조언할 자격이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분의 조언을 따르려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상담해 줄 권리가 없다. 진정한 도덕적 지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담아내는 메아리여야만 한다. 우리 길의 가장 안전한 빛은 세상의 빛 대신 그리스도로부터 반사된 빛이다.
A.W. 토저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충고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숙한 성도의 삶은 섣부른 판단과 간섭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자신을 내놓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누군가를 위해 유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섣부른 충고보다 스스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 먼저 확인하십시오.

성숙한 상태

성도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어합니다. 또한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을 챔버스는 미성숙이라고 말합니다.
성숙한 삶은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어린아이 같은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면 그분께 쓰임받고 있다는 의식마저 들지 않습니다.
이 부분 역시 이해하고 삶에서 적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부모님께 순종할 때 의식적으로 하나요? 만일 그렇다면 그 아이는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아닐 것입니다. 진짜 순종하는 자녀는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행하겠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기를 원한다면,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면, 아직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한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교만해지거나 연민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진정으로 성숙한 상태가 되면 이러한 희생 의식이 사라집니다. 의식하지 않고 합니다. 챔버스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의식적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굉장히 좋은 그리고 생각해볼 만한 말이죠. 다시 한번 읽어드립니다. 성도는 의식적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이 말씀도 좀 묵상해 보겠습니다. 스스로 성숙한 성도라고 의식하며 산다면 얼마나 교만하겠습니까? 단지 삶에서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무의식적으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 애스 듣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성숙한 단계는 아닙니다. 성도로서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우리의 삶을 양도하여 자연스럽게 성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요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로지 우리가 주님과의 신실함 가운데서 조용히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성도가 되려고 의식하지 않아도 성도로 사는 방법은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당신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순종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도 성숙한 성도의 삶을 꿈꿉니다. 우리는 늘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의식하며 살아갔지만,  의식하는 것 자체가 아직 우리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묵상을 통해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자연스럽게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자신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얼마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도 우리에게 하루의 삶이 주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우리의 삶에서 성숙한 성도의 삶이 자연스럽 드러나는 그런 일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십시오.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창세기 24장 27절


하나님과 깊게 하나가 되면 주님께 나를 어떻게 인도해 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며 자녀라면 불순종을 원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순종할 것입니다. 불순종을 하면 직감적인 갈등이 생깁니다. 영적 세계에서 이 직감적인 갈등은 성령의 경고입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경고를 주시면 당장 멈추고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주님께 이렇게 저렇게 나를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경건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인도하사."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라면 지난날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 특별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나 모든 상세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려면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우연하게 발생하는 일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과 무관한 것으로 보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고 당신의 신념에 비정상적으로 전념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나는 절대로 그것만은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 당신이 성도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은 일관성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변함없는 일관성을 유지하셨습니다. 성도의 단 한 가지 일관성은 원칙이 아니라 신령한 생명입니다. 신령한 생명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된 영혼이 되는 것보다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광신자가 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충성할 때 놀라울 정도로 우리를 낮추시는 일들 특히 우리의 종교적 자만을 낮추시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민감하기

11월 말씀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남은 60 여 편의 묵상이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가만히 보면 며칠 동안 나누었던 고난, 계획, 거듭남과 같은 주제들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반을 둔 문제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인생에서 고백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며 살피게 될 것입니다. 챔버스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깊게 하나가 되면 주님께 나를 어떻게 인도해 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챔버스의 이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종종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님께 묻고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챔버스는 이와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요점을 그의 의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어쩌면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굳이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순종의 길을 갈 것입니다. 조금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가 오늘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을 할지 하나하나 묻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할 때 성령께서 민감하게 지적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의 일 사이에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죠.
챔버스는 이러한 갈등을 성령의 경고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 사용하는 경고라는 영어의 모니션이라는 단어는 충고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고하신다는 거죠. 충고는 귀를 막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경고는 마음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순간순간마다 무엇을 물어야 한다. 이런 의미가 아닌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사람들이 성령님께 민감한 상태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부분을 반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매순간 무엇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사람들이 성령님께 민감한 상태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저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됩니다.
만일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주님께 이렇게 저렇게 나를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경건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뜻이죠. 사무엘상 7장 12절에서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서 하나님께 기념비를 세우며 했던 고백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혼난 사람이라면 지난 날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묻지 않아도 하나님 마음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훈련

성령님께 민감한 삶은 한 번의 영적 체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챔버스의 묵상 글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영적 훈련입니다. 민감함 역시 훈련을 통해 점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삶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산 정상으로 인도하셨다가도 세상의 골짜기로 데려오십니다. 변화산에서 들렸던 음성을 세상 한가운데서도 들어야 합니다. 아무런 방해가 없던 변화산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명확하게 들렸지만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더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에 민감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저에게 흥미로운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늘 목사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이었죠. 꽤 오래전입니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갔는데 뒤에서 누가 목사님이라고 부르더군요. 무의식적으로 저를 부르는 거로 생각하고 뒤를 돌아봤는데 저와 같이 뒤를 돌아본 몇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가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영어 학원을 다니던 시절입니다. 이미 저는 목사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다음이었어요. 저보다 어린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던 교실에서 누군가 아저씨라고 부르더군요. 저는 고개를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저씨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아저씨가 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적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예화가 될 것 같죠. 일상의 영적 훈련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성령님께 익숙해져야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익숙해지면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님께 익숙해지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게 됩니다. 챔버스가 말하는 이 부분도 아주 중요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은 일관성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변함없는 일관성을 유지하셨습니다. 성도의 단 한 가지 일관성은 원칙이 아니라 신령한 생명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면 자신이 믿는 바를 맹신하는 광신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모른 채 자신의 믿는 바를 확신하고 자랑하며 사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확신범이라는 것이죠. 자신의 확신이 얼마나 빗나갈 수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성령께 민감하기 위한 영적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영적 민감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당신은 성령님께 민감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확신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도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렇게 굳게 믿으며 또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고 기도하지만 진정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성령님께 민감한지,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행여 성령 있게 민감하기를 포기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하나님 오늘 우리 기도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께 민감함을 구하는 기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말씀 앞에서 서고 말씀 앞에서 움직이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우리 가운데 민감하게 말씀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믿음과 체험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기분과 싸워 이겨서 자신을 주 예수님께 완전히 드려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체험에서 나와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십시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말하는지 생각해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비참하고 형편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이러저러한 체험을 해보지 못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이 무엇을 요청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바치십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순결하고 완벽하게 고침받은 존재로 철저하게 의롭고 조금도 흠없는 존재로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주 예수님에 대해 분명하고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든든히 서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내 희생이 어떠하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분은 나를 지옥과 파멸로부터 구원해 주셨는데 어떻게 내 희생에 대해 따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회나 책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분이요,  우리를 그분의 발 앞에 죽은 자같이 만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 체험을 주신 분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만을 향한 우리의 완전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으며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실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만을 향한 절대적인 강한 확신 가운데 세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불신앙을 향한 성령의 엄격한 독촉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악한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세우려고 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이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무엇도 억제할 수 없는 승리의 믿음을 온전한 찬양 가운데 드러냅니다.


기분에 휘둘리지 않기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기분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관념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면 진정한 믿음이 아니죠.
5월 20일 묵상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기분이란 기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발로 차버려야 떠납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다가옵니까? 오늘 묵상 첫 문장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기분과 싸워 이겨서 자신을 주 예수님께 완전히 드려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체험에서 나와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십시오.
진정한 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기분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레몬심리에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이지 누구나 기분을 드러낸다 내 기분은 내 선에서 끝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겉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기분과 태도는 별개다 내 안에서 저절로 생기는 기분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태도는 다르다 좋은 태도를 보여주고 싶다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기분이라는 말 영어로 무드라고 하는 거죠. 이 기분은 때때로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깊은 스올로 끌어내리기도 하고,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통받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분이 우리 신앙의 태도가 되지 않게 주 예수님께 모두 맡기는 것이 기분과 싸워 이기는 방법입니다.
기분에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어떤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며 자신의 희생을 자랑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분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 담대의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이러한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회적인 체험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번 강조한 말이죠. 구원의 은혜는 한 번이면 족하지만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회나 책 속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 체험을 주신 분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체험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때는 체험을 주신 주님을 향한 믿음이 온전할 때입니다. 체험에 만족하면 그 체험을 붙잡고 안주하지만 체험을 주신 분께 집중하면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세상과 싸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A. W.토저의 [하나님을 체험함]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 자체가 공론은 아니다. 모든 공론은 믿음의 대상이신 주님께이다. 믿음은 눈을 돌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영원의 눈이 왜곡되어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보자 위에 내 보좌를 두리라고 말했던 루시퍼의 죄에 버금가는 악한 죄다 믿음은 안이 아니라 밖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 삶 전체가 질서를 그렇다고 체험을 하찮게 여기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실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나오는 글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끊임없이 '내게 믿음이 있다면 삶으로 증거하라고 주장한다. 체험은 절대로 내 믿음의 바탕이 될 수 없다. 체험은 단지 내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놀라운 구원을 체험했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 이 체험들은 단지 공상이 아니라 실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한 이후 날마다 놀랄 정도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새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대신 체험에 두게 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위험에 빠지면 우리의 믿음은 삐뚤어지면서 그릇된 믿음으로 전락하게 되는 성령 세례를 받은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그들이 가르친 교훈과 일치된 삶을 살았다. 즉 성령님을 받은 그들이 살아있는 서신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내가 믿은 바를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체험은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의 믿음보다 우리의 체험보다 무한하게 크시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진 믿음의 선상에서 발생한다. 당신은 당신을 아는 자들에게 당신의 체험을 간증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즉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으로 인해 '지금의 당신'이 되었음을 증거할 수 있는가 당신은 예수께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실 수 있다고 믿는 말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을 통해 일들을 다 이루셨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체험이 믿음의 바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체험은 단지 믿음이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오늘 하루 이런 질문을 가지고 살아봅시다

체험에 만족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삶은 등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큰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믿음으로 우리들의 삶에 체험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체험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면서 체험만을 이야기하며 그 체험을 가능케 하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과거의 체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나의 삶을 통해서 증명되는 사람 그것이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현재의 사건으로 체험되는 그 믿음이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주님은나의최고봉 #주나최 #김병삼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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