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당혹스러움의 훈련| 주님은 나의 최고봉(김병삼 목사님)
당혹스러움의 훈련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마가복음 10장 32절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팔아 모든 삶을 주를 향한 사랑을 위해 던지는 것이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앞서 가시는데 매우 낯설게 보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앞서가시는데 그들은 이상히 여기더라" 예수님께는 제자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서늘하게 하시면서 그들의 모든 영적인 삶의 호흡을 가쁘도록 만드십니다. 단호한 얼굴로 준엄한 결단을 하시는 그분의 낯선 모습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때 그분은 더 이상 상담자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그러한 표정으로 서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깜짝 놀라며 이상하게 여기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큰 거리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주님과 친근감을 느낄 수 없고 그분은 저만치 앞서가십니다. 그리고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도 없고 목적지는 이상하고 멀게만 느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죄악과 슬픔을 가장 깊은 곳까지 다 이해하셔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보이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뵐 때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삶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전방에 계신 아주 이상한 모습의 지도자이신 그분에게서 전혀 친밀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제자의 길에서 당혹스러움의 훈련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제자의 길 가운데 위험은 자신의 작은 열정에 묻혀서 헌신하는 것입니다.(사 50:10-11) 당혹스러운 상황이 오면 어두운 상황이 끝날 때까지 잘 견디십시오. 때가 되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의 매일 만나 365, 오늘은 3월 15일 당혹스러움의 훈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주님이 낯설게 느껴질 때
오늘 묵상은 이전에 나누었던 구름과 흑암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 혹시 이 부분이 조금 희미해진 분이 있다면 1월 말씀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구름과 흑암의 때를 지나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훈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원본에 'The Discipline of Dismay'라고 되어 있습니다. '낭패 혹은 실망'을 통한 훈련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낭패감이 찾아올 때 얼마나 당혹스럽습니까? 질문은 바로 그런 제자들에게 찾아왔던 당혹스러움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당혹스러움은 낭패와 실망 가운데 찾아온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입니다. 3년이나 함께 공생애를 지냈던 제자들인데 앞서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낯설게 느껴집니다. 낯설음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던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죠. 여기에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제가 조용히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낯설음은 주님의 모습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이 생각했던 주님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생각과 달라서 주님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주님을 잘못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챔버스는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큰 거리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주님과 친근함을 느낄 수 없고 그분은 저만치 앞서가십니다. 그리고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이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가 주님을 친숙하게 느끼고 있었다면 내가 원하던 주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혹시 우리들에게도 이런 당혹스러운 순간이 찾아왔나요? 주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더 이상 나에게 친절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순간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객이 전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었지만 사실은 주님이 나를 섬겨주시고, 주님이 내 뜻에 맞춰주시고, 주님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져주시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갓피플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어떤 분이 '낯선 하나님'이란 표현을 쓰셨습니다. 한번 읽어보면 공감이 될 것 같습니다.
이삭을 주시고는 다시 바치라고 하셨던 아브라함의 낯선 하나님
출애굽 하라 하시고는 홍해를 직면케 하셨던 모세의 낯선 하나님
여리고성을 정복하되, 침묵으로 7일간 성 주위를 돌라 하신 여호수아의 낯선 하나님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시고는 도망자 신세로 살게 하신 다윗의 낯선 하나님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스는 무서운 강풍과 강진 그리고 모든 것을 삼킬 만한 두려운 불속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던 엘리야의 낯선 하나님
적대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요나의 낯선 하나님
메시아임에도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따르라 하신 제자들의 낯선 하나님
고통과 절망 중에도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으로 감싸 안으시는 나의 낯선 하나님
실제로 살아가면서 낯선 하나님을 우리는 만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큰 고난으로 힘들 때, 너무 오래 지속되는 고난에 지칠 때,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닌 낯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하면 어떤 분이라는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낯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눈이 뜨이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현관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당혹스러움'이라는 훈련
당혹스러움이 찾아오는 것이 훈련의 시간이라면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훈련의 시간을 잘 이겨내면 얻는 것이 있고 또 이 시간에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죠. 다시 한번 당혹스러움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 아니 우리가 알고 싶지도 경험해 보고 싶지도 않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모든 죄악과 슬픔을 다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승리와 영광 중에 오시는 주님이신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 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이라면 우리도 주님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도저히 그 길에서 주님과 친밀함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챔버스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제자의 길에서 당혹스러움의 훈련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제자의 길 가운데 위험은 자신의 작은 열정에 묻혀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우영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예화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손님이 찾아왔답니다. 꿈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신이 얼마나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손님이 열심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성도는 자신의 품속에 손을 넣어 열심 덩어리를 꺼냈습니다. 저울에 살아보니 백 근 정도 나갔는데 그런데 손님이 100근의 열심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분석해 보았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야심이 20프로, 의심이 19프로, 명예심이 30프로, 기타 28프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단 3프로도 안 되는군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의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며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그를 얼마나 당혹스럽게 했는지요? 자신의 최선이 최선이 아님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오늘 챔버스는 이렇게 찾아오는 당혹스러움이 우리들에게 훈련이 된다고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부자 청년은 훈련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훈련의 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버거운 훈련의 시간이 찾아올 때는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주님을 따르는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줄 노트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말고 진정한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낼 묵상질문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무엇일까요?
주님 때문이 아니라, 혹시 주님을 향한 나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왔는데 혹시 오늘 주님이 우리들에게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원했던 것들이 무너지며 주님이 오늘 우리 앞에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당혹스러운 이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혹시 훈련의 때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견디는 믿음도 허락하여 주옵시고, 기다리는 용기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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