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영적 불굴의 자세| 주님은 나의 최고봉(김병삼 목사님)
영적 불굴의 자세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편 10절
불굴은 인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과 소망을 바라며 인내하는 것이 합쳐질 때, 이를 불굴이라고 합니다. 불굴은 실패할까 두려워 매달려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의 영웅이 패배하지 않을 것을 강하게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최대의 두려움은 자신들이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패배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곧 주께서 보장하셨던 사랑, 공의, 용서, 자비가 결국 승리하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때 영적 불구를 촉구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음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견디라는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라는 음성입니다. 만일 당신의 소망이 지금 난관을 겪고 있다면, 이는 소망이 정결케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결한 꿈과 소망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인생에서 힘든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계 3:10). 그러므로 영적으로 불굴의 자세를 지니십시오.
매일 만나 365 오늘은 2월 22일 영적 불굴의 자세라고 하는 제목으로 역시 두 개의 대지로 나누어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내와 불굴의 차이
챔버스의 오늘 묵상 역시 아주 흥미로운데, 인내라고 하는 말과 불굴이라고 하는 단어의 차이를 통해 우리가 견지해야 하는 신앙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인내(endurance)'한다고 하는 것은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참고 견디는 것이라면, '불굴(tenacity)'이라고 하는 단어는 절대적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의 소매상협회에서 세일즈맨이 거래실적과 집념의 상관관계를 연구했습니다.
물건을 판매할 때 세일즈맨의 48프로 단 한 번을 권유하고 포기합니다. 25프로의 세일즈맨은 두 번 권유하고 포기합니다. 15프로의 세일즈맨은 세 번 권유하고 포기합니다. 세일즈맨 중 오직 12프로만이 네 번 이상 권유를 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네 번 이상 권유하는 이 12프로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프로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88프로의 세일즈맨이 판매한 상품은 고작 20프로에 불과했습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발표한 사실을 아는 사람 그리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모르는 사람은 그저 참고 인내하면서 세일즈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이 결과를 아는 사람은 결과를 알기 때문에 기꺼이 인내하며 참을 수 있을 겁니다.
그저 참는 인내는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지만 결과를 아는 인내는 절대적 확신과 소망 가운데 일어나는 것, 바로 이 개념을 챔버스는 불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무조건 참으라는 인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불굴의 신앙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는 이유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인내는 두려움이 있지만 불굴에는 두려움이 아닌 확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에게 찾아온 두려움은 자신들이 망하게 될 것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패하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찾아왔던 것이죠. 이러한 두려움 가운데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불굴은 이런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확신으로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챔버스의 글을 인용합니다.
그 음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견디라는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가운데 구체적으로 일을 진행시켜 나가라는 음성입니다.
인내가 정적인 것이라면, 불굴은 동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편 46편은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출애굽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을 때 찾아온 가장 큰 두려움은 홍해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뒤에는 애급 군사들이 쫓아오는 진태 양란의 상황이었던 것이죠. 얼마나 두려운 순간이었을까요? 이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만히 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이것이 불굴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인내가 그저 차마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라면, 불굴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소망을 붙들고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불굴'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찾아왔다면
그럼 우리들에게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인내가 두려움과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고, 불굴이 확실한 소망을 붙드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고난이라고 하는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아무리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고난이 찾아오면 힘들고 아픈 것이니까요?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힘든 것은 고난의 시간을 참아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태도로 기다리느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챔버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만일 당신의 소망이 지금 난관을 겪고 있다면, 이는 그 소망이 정결케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결한 꿈과 소망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소망이 정결케 된다" 우리가 좀 묵상하면서 시간을 들여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고난을 받고 있다면 고난을 통하여 진짜 소망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저는 그렇게 묵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가짜라면 고난의 시기 가운데 소망을 버리게 될 것이고,
소망이 진짜라면 고난 중에 단단하게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할 때 소망이 정결케 되는 과정이구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캘빈 신학대학원 총장을 지낸 코넬리우스 플랜틴카 주니어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좋은 글이라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중세 시대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을 대죄로 여겼다 그러나 어리석은 낙관주의도 역시 치명적인 죄이며 그것을 기독교적 소망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 죄이다. 낙관주의는 '걱정하지 마.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끝까지 사태를 다룰 수 있는 보다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될 거야.'라고 말한다. 낙관주인은 '기운을 내'라고 말하고 소망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너의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소망은 광야에서 사막에서 유랑 생활 중에 선물로써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백일몽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현실을 대면하여야 하는 미래를 향하여 분투하는 소망을 동반한 믿음이다. 기독교적 소망은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있으며 고난 중에 인내하는데, 인내는 인격을 낳고 인격은 소망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러한 소망의 묘지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하나의 중심적인 소망을 굳게 붙잡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고 바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 안에서 집약된 소망이기 때문이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글에서 요한계시록 3장 10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빌라델비아에 있는 초대 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기에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시험을 면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 확실함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시니까 말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소망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완성 적용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간증을 듣습니다. 내가 작정하고 기도했더니, 내가 금식했더니, 이런 류의 말들이죠. 가만히 보면 상당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의가 아닌 나의 의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시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갖게 하셨을까요?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능성이 다 끊어진 가운데서 소망을 붙들 때, 비로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을 정결케 하시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닐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한 줄 노트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우리 소망의 정체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오늘을 살아낼 묵상질문
혹시 여러분들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이 소망을 향해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내가 참 좋은 말인데 너무 힘겹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저 인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굴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 가운데 기다림의 시간, 고난의 시간을 가고 있다면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소망이 정결케됨을 믿으며, 승리를 바라보며 기다리며 인내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출처 : 유튜브 김병삼 목사의 매일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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